탕상수첩, 다섯 번째 기록
투명하다는 것은 어떤 무언가가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날것의 무언가를 보는 행위는 그것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게 해준다. 순수하게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 슬프지만 그래서 인간은 늘 투명할 수 없다. 사물의 모양을 인식하는 인간의 눈은 각막과 시신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빛의 반사 정보를 뇌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본질을 가로막는 일차 장벽이 생긴다. 거기에 더해 사회적 인식, 통념, 편견은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을 먹이로 이차 장벽을 형성하고, 인터넷, 티비, 모바일은 화룡점정. 디지털이라는 시대를 먹이로 3차 장벽을 만든다.
이 정도면 카테나치오, 만리장성급 수비 스탠스가 아닌가 싶은데,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장벽을 부수는 것. 하지만 방법이 간단하다고 해결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상식과 편견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견고한 틀이다. 두들겨 부술 수 있다면, 적어도 만 번은 두들겨야 하지 않을까. 뭐든 만 시간을 하면 그 분야의 장인이 된다는데, 아직까진 편견 제거 장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뭐, 나타나기만 하면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세계 대통합도 꿈은 아닐 거다.
아무튼, 소문난 맛집이 늘 그러하듯 기다림을 상쇄하는 훌륭한 맛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무색하게 쌍용반점은 보란 듯이 편견의 틀을 깨 주었다. 역시 장인이다. 나는 장인이 없으니 명인으로 부르겠다. 주방장 선생님은 명인이 분명하다. 명인을 선택한 내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 안도하고, 선택지가 군산이었다는 것에 다행스러움을 느낀 순간이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 만 번의 웍질과 오만 번의 설거지가 콜라보레이션 되었을 거다. 견뎌냈어야만 했을 긴 인내의 시간이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내 마음처럼 투명하다. 소스를 끼얹었음에도 그 속이 훤히 내비치는 정도라면 소스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시각적으로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아 마치 그냥 고기튀김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렇게 보니 약간 탕수육 디오라마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명인의 솜씨를 너무 평가절하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드니 이쯤에서 그만하겠다.
사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는 극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데, 처음 보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곧 맛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고, 이럴 경우 모나지 않게 맛에 조금만 변주를 줘도 굉장히 특별하다는 인식을 줄 수가 있다. 여타 음식이 그러하듯 탕수육 또한 보이는 맛으로 안전범위 안에서 충분한 시각적 충격을 줄 수가 있기에, 점잖으면서도 꽤나 파격적인 시도가 가능하다. 물론, 맛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앞선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겠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군산엔 짬뽕으로 유명한 중식당이 더러 있다. 이 집도 그중 하나인데, 맛이 솔찬히 괜찮은 부분이다. 쌍용반점의 특징은 손님의 경우 기다림에 들들 볶이고 먹지 못해 초조해하는데 반해, 정작 매장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여유롭다는 것이다. 장사가 잘되어 배짱 영업을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아는 것이다. 탕수육이 튀겨지는 시간, 면이 삶아지는 과정, 기다림, 손님과 직원의 교우,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군산의 갯내, 정취, 그리고 또 기다림.
시간의 흐름은 기다림이라는 순리를 동반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은, 비록 상대적일 지라도,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제 그 기다림을 무기로 한 방 두 방 내 편견에 잽을 날린다. 1초에 한 대씩. 1분은 60초, 10분은 600초, 100분은 6000초. 그럼 만 대는? 166.6666666…분. 자, 3시간만 버티면 ‘편견’을 두들겨 부술 수 있다. 그렇지만 3시간 동안의 배고픔을 견뎌낼 수 있다면 그건 장인, 명인이 아니라 성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순리고 나발이고, 일단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가 맛있게 먹기로 하자.
한 테이블에 있는 애들인데, 얘네만 안 짚고 넘어가기는 좀 미안해서,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관심을 갈구하는 무언가에 관심을 쏟는 건 동정을 가장한 미안함의 해소가 아닐까. 쓰고 보니 미안함보다 동정이 더 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렇게 어렵다 감정이라는 건. 이것 또한 내 편견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