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후쿠오카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연말이면 사라질 마일리지 때문이었다. 곧 유효기간이 끝나는 마일리지가 있다는 메일을 받고 보니 올해부터 내후년까지 사라질 마일리지가 2~3만 마일리지 정도였다. 이제 캐나다에 살고 있다 보니 나에게는 참 애매한 수준의 마일리지였다. 캐나다 왕복 항공권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날려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이번 여름에 한국에 들어가니 그때 마일리지로 후쿠오카나 다녀오자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가족 마일리지까지 모두 끌어 모으니 세 장의 표를 살 수 있었다. 그렇다면 2번과 3번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녀와 볼까 몇 분 고민을 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긴 했지만 막상 2번 3번이 없는 여행은 상상할 수가 없어서 두 장의 표를 더 샀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나서 후쿠오카에 있는 지인 두 명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2000년대 중반 교환학생으로 후쿠오카에 갔을 때 알게 된 유도부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함께 운동을 했던 친구이고 한 분은 나보다 20살 정도 나이가 많으신 유도부 OB이다. 예전에는 아주 가끔씩 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는 정도라 몇 년씩 소식이 끊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마저 연락이 끊긴다면 내가 일본에서 운동을 했던 기억마저 점점 희미해질 것 같았다. 마침 매년 연말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카드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3~4년 전부터 그 지인들에게도 매년 카드를 보내고 있다.
같이 운동을 했던 친구에게는 아쉽게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는다. 인생을 딱 절반 살아보니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있고 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내가 싫어서 안 만나려고 하는 것은 아닐 테니 아쉽지만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때 보면 될 일이다 (나중에 답장이 왔는데 너무 오래된 hotmail로 메일을 보낸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나보다 20살 정도 나이가 많으신 유도부 OB 분은 곧 답이 왔다. 시간이 된다면 만나고 싶다고 하신다. 생각해 보면 마지막으로 그분 가족들을 뵌 것이 1번이 백일을 갓 지났을 때였다. 이제 그 1번도 만으로 13살이 되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오랜만에 도착한 후쿠오카는 여전했고, 여전히 무더웠다.
한국도 나에게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더웠지만 후쿠오카는 그 이상으로 더웠다. 7월 중순이었는데 이미 35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았나 싶었다. 일본 남자들은 여름에도 반바지를 잘 입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반바지를 입고 있으면 관광객일 확률이 80% 정도는 된다). 나도 당시에는 멋져 보여야 하니 긴바지를 고집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덥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도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는 머리 위에서부터 나이아가라 폭포가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긴바지를 입고 줄줄 땀을 흘리는 게 멋져 보일까, 반바지를 입고 졸졸 땀을 흘리는 게 멋져 보일까. 둘 다 멋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그냥 반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후쿠오카는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첫날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려고 가족권을 샀다. 가족권은 자녀 수가 몇 명이든 상관없이 천 엔이라 우리 같은 대가족에게는 필수였다. 우리나라라면 당연히 카드로 된 패스를 줄텐데 여기는 종이에다가 성인수 '2', 자녀수 '3'이라고 손으로 적고 곱게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마다 역무원에게 들러서 표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면 역무원은 표에 적힌 숫자를 보고 사람 수를 세어보고는 통과시켜 주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모든 역의 개찰구에 역무원들이 있다는 소리다.
또 호텔 체크인을 하는데 묵는 사람들 여권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다. 참 별 것을 다 확인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여권을 복사해도 되냐고 물었다. 도대체 숙박하는 사람들의 여권까지 왜 복사해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크게 상관이 없어서 말은 말았다. 차라리 칠팔십 년대 같이 호텔 숙박부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놀랍도록 변한 것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게에서 일을 하는 사람 중에 동남아 친구들이 엄청 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후쿠오카에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외국인 노동자를 본 적이 없었다(그때도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는 달랐을 수도 있겠다). 아, 학교에서 연결해 준 연말 알바 자리에서 베트남 학생들과 농장에서 같이 일을 한 적은 있다. 그때 기온이 0도 정도에 아주 약간 눈발이 흩날렸는데, 한 할아버지가, 나와 베트남 친구들을 보면서 '이것이 일본의 추위다!'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속으로 '참 더럽게 춥네요'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나 돈키호테 같은 곳에 가보니 밤에 일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동남아 친구들이었다. 일본은 인구가 본격적으로 줄고 있다고 하니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운가 보다. 그것을 보면서 한국도 곧 이와 같이 되겠구나, 아니 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나쁜 뜻은 아니다. 그냥 한국도 곧 이민을 많이 받아야 사회가 돌아갈 텐데 과연 사람들의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다.
혼자서 야심 차게 시작하는 Been There 시리즈 - 후쿠오카 (1) 끝.
참고로 Been There 시리즈는....
여행을 가는 도시마다 스타벅스 Been There Series 머그컵을 사고 있다. 사실 와이프 친구분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시작한 것인데 어느새 20개 정도 모인 것 같다. 컵을 하나씩 꺼내서 그 도시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