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

보이지 않는 연대

by 우리동네지영씨

불편하시죠? 저랑 교대하실래요?


오늘 기온 영하 6도.

현수막을 길게 편다. 기자회견 시작 전에 사진을 찍는다며 사람들이 현수막 뒤로 선다.


자리를 잡지 않고 뒤에 서 있으니 누군가 앞에 서라며 자기 자리를 내준다.

"저는 사진 안 찍어도 괜찮아요."


양쪽에서 동시에 한마디 한다.

"아휴 무슨 말이에요. 사진 찍어야죠."


현수막 양쪽 끝이 각목으로 감싸있다.

행사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현수막 길이를 달리하는데 오늘은 상당히 긴 편이다.

저 끝에서 현수막을 펼치며 사람이 다가온다. 다른 끝자락을 잡고 있으라며 나무를 쥐어준다. 평평하게 당기란다. 얼떨결에 받아든 사람이 힘을 줘 보지만 현수막 모양이 마땅치 않다.


그 사람이 또 다가온다. 이번에는 나무 아랫부분을 발로 밀며 버티라고 알려준다.

한 손은 현수막을 윗부분을 잡고, 한쪽 발은 현수막을 미느라 고정한 채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내 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하다.


교대하자는 말에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발을 뺀다.

손을 보니 장갑을 끼고 있다.

장갑을 차에 두고 와 맨손이라 차마 손까지 교대하자는 말까지는 못했다.


현수막이 평평하게 서 있도록 나는 한쪽 발을, 옆 사람은 한쪽 손을 내주었다.

우리는 현수막 끝에 서 있다.


보이지 않지만 사진 찍기 전 자리 선정 싸움은 치열하다.

여기는 선착순 개념도 없는 세상이다. 늦게 왔어도 당연히 가운데를 파고든다.

중심을 향한 본능인지, 사진을 찍으러 많이 다녀본 경험인지 양보는 없다.

다 서고 보니 가운데 자리엔 어김없이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야 하는 경쟁.


그날도 굳이 거기 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뒤로 물러나면 될 것을 끼어든 사람이 버티는 꼴이 밉상이었다. 버티려고 온몸에 힘을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거기 끼어서 버텼다.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행동으로 드러나 나에게 들켰다. 오기가 생겼다.

그날 이전에도 끝에 보이지 않는 자리도 괜찮았고, 그날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자리가 상관없다. 다만 내가 현장에 함께 했다는 걸 내가 아니까 나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만이다.

그날의 힘겨루기는 내 몸에 생생히 남아있다. 사진 찍을 때마다 떠오른다.


한쪽 손과 한쪽 발을 내어준 우리는 여전히 끝, 가장자리에 서 있다.

기자회견이 길어진다.

발을 한 번씩 쳐다보게 된다. 교대하자고 할까 하다가 옆 사람의 장갑 낀 손에 눈길이 머문다.

혼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불편한 마음을 누른다.


보이지 않는 연대


현수막은 평평하게 버티고 있다. 현수막 안쪽 다른 사람들은 돋보인다. 불편한 건 우리지만 다른 사람이 돋보여도 상관없다. 전체가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기자회견을 마치도록 하는 게 우리 목표니까.


한 시간 만에 기자회견이 끝났다. 중심에 섰던 사람들은 웃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


내가 온전히 가운데 설 수 있을 때, 그건 누군가가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가운데 있다면 그 끝에 나를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가운데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을까.


서야 하는 자리를 아는 것도 능력이다.

가운데를 비워주는 사람들의 배려를 당연히 누리지 말라.


사회자 목소리는 단단하고, 함께 노래도 부르고, 직접 썼다며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사이사이 구호도 외친다. 함께 분노하는 순간도 있었다.

기자회견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건가.


준비해준 분들의 노고에 나도 작은 힘을 보탰으니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고

즐거웠던 기억만 남겨둬야지.


이게 내가 선택한 자리, 오늘 내가 서 있던 자리다.

작가의 이전글최주는 왜 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