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협력’을 시작해 보자

by 카이기경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로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일과시간이 시작됐을 무렵, 오늘은 오후 9시 이전에 업무를 마치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후 5시 30분쯤 회사를 나와서, 고3 수험생을 둔 직원분들께 나눠드릴 수능 대박 기원 엿 선물세트를 사고, 내일 대전의 한 호텔에서 있을 연구개발 부문 실무면접 장소를 최종 점검하고 집으로 출발하면 확실히 오후 9시 이전에 집에 도착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를 나서려던 무렵, 예정되지 않은 미팅에 소집되었고, 수능 대박 기원 엿 선물세트를 사러 나서는 시간이 1시간 정도 지체되었다. 그래도 10시 이전에는 집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떤 직원분의 명함이 당장 내일 필요하다는 전화였다. 이미 늦은 시간이고, 내일은 면접 진행을 위해 온종일 호텔에 머물러야 하기에, 당장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최근 바쁜 업무로 가족과 제때 저녁을 함께 먹은 적이 없었던 탓에 오늘만은 기필코 저녁을 함께하자 약속하고, 저녁 메뉴로 청국장을 낙점한 상태였다.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라 여길 수 있는 시간 안에 귀가하지 못할 것이 점차 확실해짐에 따라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선물 가게를 들르고, 호텔에서 면접 장소를 확인하고, 명함 제작업체에 방문해 급한 대로 내일 필요한 명함만 찍어 회사로 복귀 후 물건을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선을 따져보니 10시에 귀가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보였다.


우선 예상치 못하게 늦을 것을 아내에게 알렸다. 매우 아쉬워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내는 내가 열심히 일할 직장이 있는 것에 감사한다며 일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선물 가게에 7시까지 가기로 약속했었는데 이미 시간이 지나서 늦는다 전화하고, 언제까지 가면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참이었다.


세종에 있는 회사에서 대전에 위치한 모든 목적지를 경유하고, 세종의 집으로 돌아오려면, 호텔부터 들르는 동선이 가장 빠른 것인데, 선물 가게와의 시간 약속이 마음에 걸려 운전대를 잡자마자 선물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운전 중에 선물 가게 전화번호를 찾아, 업무가 바빠 전화를 잘 받지 않는 그 가게에 계속 전화를 시도하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업무와 아무 관련 없는 아내에게 선물 가게 이름을 알려주고, 연락해 현재 상황을 설명한 뒤 언제까지 시간을 늦춰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 요청했다. 세종에서 대전의 목적지별로 향하는 길이 달라지는 갈림길까지 거리가 상당했기에, 내가 하려고 마음만 먹었던 일을 아내에게 ‘아웃소싱’하고 마음 편히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곧 아내에게 연락이 왔고, 선물 가게에서 오후 11시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덕분에 귀가까지 가장 빠른 동선으로 목적지를 모두 순회할 수 있었고, 처리해야 했던 각 각의 업무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덕분에 나는 좀 전까지 가족과 식탁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어찌 보면 나는, 상대방에겐 아주 작은 부탁일 수 있는데, 상대방의 업무나 관심사와 관련이 없어서, 상대방이 매우 바빠 보여서, 부탁하면 왠지 거절당할 것 같아서 등의 온갖 고민을 하며 쉽사리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오늘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도움을 받아, 혼자 해결하려 했을 때보다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들고, 그렇게 절약한 자원으로 상대방에게도 유익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한다면, 결국 나에게만이 아닌 도움을 준 상대방에게도 흡족할 만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은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힘들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나 자신이 능력 없고 작아 보이진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고민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면, 같은 이유로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도움을 주거나 받지 못한다면, 어디서든 협력할 수 없다. 협력은 내가 먼저 도움을 청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