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둑놈 심보를 가진 자였다

by 호주아재

호주의 여름은 달력에 적힌 계절 이름보다 훨씬 실감 나는 체온으로 항상 기억된다. 11월이 시작되면 햇빛은 금세 강해지고, 12월 한낮 기온은 40도를 훌쩍 넘어선다. 바닷가 모래는 맨발로 몇 초도 버티기 힘들 만큼 달궈지고, 휴양지에는 끊임없이 관광객들이 밀려든다. 도시 전체가 열기로 출렁이는 계절이다.

이런 여름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 주방은 그 열기를 고스란히 끌어안는다. 호텔 전체를 시원하게 유지하려고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주방의 열기 앞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불 앞에 서 있는 동안만큼은 바깥의 더위가 오히려 더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다.

주방의 공기는 서서히 달아오르다가 1월이 되면 시간의 속도까지 끓어오른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생활이 아니라 작전이다. 아침에 불을 켜면 밤까지 꺼질 틈이 없고, 하루 2000인분이라는 숫자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로봇처럼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상태가 된다. 그냥 너무 바빠서 생각할 틈이 없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구조조정까지 겹쳤다. 인원이 줄어든 자리만큼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은 자연스럽게 더 무거워졌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눈앞에 쌓여 있는 일의 양이 먼저 실감 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이렇게 바쁜 시기를 보내다 보면 삶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이 생긴다. 내 경우에는 책과 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 읽기를 안 하고, 갱년기를 극복하게 해 준 글쓰기를 안 하며 지낸 시간이 어느덧 석 달 가까이 쌓였다.

처음 몇 주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지친 몸으로 퇴근하면 아무 생각 없이 쉬고, 머릿속이 텅 빈 채 잠드는 시간이 꽤 달콤했다. 해야 할 숙제가 하나 사라진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손은 휴대폰을 들고 있는데 읽을 글을 찾지 않고, 브런치를 켜 놓고도 한참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는 날이 늘어났다. 마음 한쪽이 자꾸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었다.

글을 쓰지 않으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책을 읽지 않으니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몸은 분명 쉬고 있는데 머릿속은 계속 어수선했다. 예전에 써 두었던 두 달 분량의 글이 예약 발행되는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지금의 나는 거기에 없는 사람 같은, 어딘가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니 조금 우스운 상황이었다. 잠시 휴재공지를 전하면 되었을 일을, 다른 사람의 글은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내 글은 여전히 발행하며 읽히길 바라고 있었으니. 참으로 도둑놈 심보를 품고 있던 못난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바쁜 시즌이라는 핑계 뒤에 잠시 숨어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서 이렇게 짧게 고백을 남긴다. 그동안 글로 인연을 이어온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댓글 하나, 좋아요 하나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면서도 잠시 그 온기를 잊고 지냈다.

3월이 된 지금, 4개월 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주방의 열기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퇴근 후 소파에 몸을 던지는 대신 다시 책을 펼쳐보려 한다. 브런치 글벗들의 문장을 읽다가 마음이 움직이면 조용히 흔적도 남길 생각이다.
거창하게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원래 하던 숨 쉬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기분에 가깝다.

바쁜 계절 덕분에 잠시 멀어졌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꽤 든든하다. 글을 쓰고 읽는 시간은 내 일상에서 사치가 아니라 균형을 잡아주는 작은 습관이라는 걸 다시 느끼는 중이다.

브런치에 들어오면 여전히 내게 온기를 나눠줄 따뜻한 글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그 흐름에 부담 없이, 그러나 꾸준하게 다시 자연스럽게 섞여보려 한다. 글벗들의 감성을 공유하며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다.

그래서 마음속에 조용히 하나만 남겨 둔다. 갑자기 사람이 확 달라진다거나, 인생이 드라마처럼 크게 바뀔 거라는 식의 거창한 기대는 굳이 품지 않기로 했다. 그런 다짐은 늘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비슷한 하루들을 이어가면 충분하다. 뜨거운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도, 집으로 돌아와 책장을 넘기는 밤도, 문장 하나로 마음을 가만히 정리하는 순간도 각자의 온도를 유지한 채 쌓여 간다.

결국 삶은 특별한 날 몇 번보다 반복되는 날들로 더 많이 채운다. 그 흐름 속에서 조금 덜 조급해하고 조금 더 따뜻하게 지내며, 앞으로도 비슷한 하루들 속에 온기를 채우며 성실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