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아들의 한마디에 멈췄다.

호주에서 처음 써본 '생활계획표', 그 안에서 다시 만난 한국의 기억

by 호주아재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국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미 '정리된 삶'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마치 MBTI의 J 성향을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방학이 시작되면 자연스레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생활계획표'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부터 공부를 하고, 몇 시에 밥을 먹고, 몇 시에 쉰다. 그리고 그 하루를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마무리한다.

그 종이 한 장에는 단순한 일정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삶의 방식'이 담겨 있다.

나는 어제, 그 익숙한 장면을 호주에서 다시 꺼내 들었다.

올해 7학년(중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이 1분기 학업을 마치고 2주간의 방학을 맞았다. 호주는 한국처럼 긴 여름방학 대신, 분기마다 짧은 방학이 반복되는 학기제다. 이번 방학은 1분기가 끝난 뒤 주어진, 말 그대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생활계획표'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자라면 당연했을 일이었지만, 이곳에서 자란 아이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날까?" "공부는 언제 할까?"
하나씩 채워나가던 중, 아들은 웃으며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계획된 하루'를 살아야 했을까?

어쩌면 그 뿌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이후, 모든 것이 무너졌던 시기. 그리고 이어졌던 보릿고개의 시간들.

그 시절을 버텨낸 세대에게 '계획'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흐트러지지 않고, 정해진 틀 안에서 하루를 살아내야만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활 방식은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문화가 되었으며, 그 문화는 다시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그래서일까.
한국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시간'을 정확하게 다룬다. 어떤 일이든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낸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보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시간에 맞춰 완성해 내는 한국 사람들은 감탄을 넘어선 놀라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호주는 조금 다르다.
시간은 흐르지만, 그 흐름을 꼭 붙잡고 살지는 않는다. 계획은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는 내 아들은 이미 '자유로운 시간'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제 완성된 아들의 생활계획표는, 내가 어릴 적 만들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더 느슨했고, 더 여유로웠으며, 무엇보다 곳곳에 '빈칸'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빈칸을 한참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동안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너무 애써온 건 아닐까. 한국에서 배운 '시간을 다루는 힘'과 호주에서 배우고 있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여유' 그 사이에서 나는 이제야 조금씩 균형을 고민하게 된다.

아이에게 무엇을 남겨줘야 할까? 빈틈없이 채워진 하루일까, 아니면 스스로 채워갈 수 있는 여지일까?

어젯밤, 아들의 방 문틈 사이로 계획표가 보였다. 완벽하지도, 빼곡하지도 않은 그 종이가 이상하게도 더 좋아 보였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빈칸 없는 하루'를 가르쳐온 건 아닐까.

이제는,
내가 그 빈칸을 남겨두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생활계획표'...쉬는 시간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