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몹시 미워했던 사람이 있었다. 직장 상사였다. 무능력하고 못생긴 사람이었다. 외모라도 잘생겼다면 조금 덜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도 못하는데 못생기고 식탐이 많았다. 유머감각이 자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웃기고 싶어 하는데 주로 앞에 있는 사람을 조롱하는 방식의 유머를 구사했고 하나도 안 웃겼다. 조롱의 대상은 그보다 직급이 낮거나 경력이 짧고 어린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같이 웃는 사람들도 싫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자기를 부풀려서 포장하는데 몰두했다. 가끔 친절해지면 자기 포장의 꿀팁 같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메일 쓰는 방법을 알려주며 내가 쓴 메일을 하나하나 교정해 줬다. 쉽게 쓸 수 있는 말을 굳이 잘 쓰지도 않는 한자 단어로 다시 쓰게 했다. 긴 미사여구를 앞 뒤로 붙이게 했다. 한 몇 년 그가 쓰는 말투로 메일을 쓰다가 구역질 나서 그만뒀다. 어려운 단어를 쓴다고 예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 정확하게 쓰인 짧은 메일이 좋다. 10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땐 경험이 모자라서 내가 생각한 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어서 시키는 대로 했다.
퇴사하고 그 사람이 너무 싫어서 카카오톡에서 차단했다. 내가 너무 싫어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가끔 그의 안부를 전해주곤 했다. 그가 잘 지내면 짜증 났고 못 지낸다는 말 들으면 고소했다. 한 5년 전부터는 그런 사람이 내 인생에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 사람 말고도 실시간으로 싫은 인간들이 충분히 많았다.
카카오톡을 업데이트하며 내가 뭘 잘못 건드린 건지 차단된 계정이 모두 풀려서 그 이름이 카톡에 다시 뜨고서야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이 났다. 죽도록 싫었지만 내 인생에 있었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멀어졌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카톡 프로필에 애 사진을 올려놨는데 얼굴만 보아도 그의 자식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붕어빵이었다. 그런데 그 애가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못생겼나. 그렇지만 어린아이는 못생겨도 귀엽다. 아이의 못생김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던 혐오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옆에 있다면 과자도 사주고 잘 놀아 주고 싶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후배들에게 과자 한 봉지 사주기도 몹시 아까워했지만 말이다. 아이 사진 페이지를 넘기자 음반 재킷 사진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었다. 영화 OST였는데 그도 그 영화를 감명 깊게 본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부모이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도 일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미움과 멀리 멀어져 버린 것이었다. 해묵은 경멸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에는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지나쳐 버렸지만, 어쩌면 이제 그와 길에서 만난다면 목례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0년 전으로 돌아가 그와 잘 지내고 싶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못생기고 귀여운 꼬마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