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 처음 들었을 때 다른 사람이 바라본다고 생각하며 자신에 대해 묘사해 보는 과제가 있었다. 전문을 찾을 순 없지만, 성실하다. 책임감 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일을 잘 수행한다. 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리 생각하지 않겠나 썼다.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님이 내 글을 읽고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고 했다.
착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가끔 들으면 내가 착해 보이려고 큰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은 당연하고 좋은 평가라고 생각했다. ‘착한’과 ‘콤플렉스’가 함께 붙으니 착함은 부정적인 의미로 느껴졌다. 거기 ‘여자’라는 단어도 흉한 소리로 들렸다. 나는 여자로서 어떻게 보이고 싶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페미니즘에 무지했으나 ‘여자’의 군집에 속하려 애쓰고 스스로 ‘여자’라 부르는 것에 동물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 후 ‘착하다 ‘에 대해 생각했다. 착하다는 말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착하다고 평하는 것은 호구 잡고 싶다는 의미로 느껴진 댔다. 확실히 ‘착하다’는 사회적으로 그저 그랬다. ‘착한 가격’ ‘착한 제품’ ‘착한 몸매’ 같은 표현은 자기 이득 남기지 않고 남에게 퍼준다는 의미인데, 대상의 기분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표현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로 쓰인 착하단 말 들으면 싫을 것이다.
‘착하다’의 네이버 사전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이고 오래된 국어사전에는 ‘(마음씨나 행동이) 바르고 어질다. 선하다.’로 쓰여 있다. 나는 착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착하게 사는 것이 마음 편해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존경스럽다. 내게 아직 ‘착하다’의 의미는 퇴색되지 않았고 상냥하고 바르게 타인을 대해 주는 사람들을 여전히 착하다고 불러주고 싶다.
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맞았다. 착하다기보다 타인의 눈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에 대해 극도로 눈치를 보며 행동했다. 내 기분보다 다른 사람 기분을 우선시했다. 남들 마음이 좋으면 나도 좋아졌고 남들 마음이 흐리면 내 마음도 흐렸다. 겉으로는 뭐든지 오케이였지만 나를 무리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미워했다. 스스로 표현하지 않으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몰랐다. 남들도 나만큼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살 거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바라는 방향으로 가기에 좋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자신에게 팍팍할 정도로 마음을 무리해서 틀어쥐면 무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그럴 거라면 그냥 지금 느낌에 솔직해지는 편이 좋겠다. 이 악물고 웃어봤자 무서워 보일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 내가 착하냐 못됐냐 가끔 물어보면 착하지도 못됐지도 않고 ‘평범하다’고 그런다. 언제는 왜 남한테 착하게 굴면서 나한테만 못됐게 구냐고도 그랬다. 나는 남편에게 무리하고 애쓰지 않는다. 남편과 있으면 솔직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고 같이 보내는 시간에 후회가 없다.
자신에 대해 애써 의식하고 정의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올바른 무엇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나빠지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온통 휘저어 대거나 반작용을 참으려고 용쓰게 된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하면 갑자기 음식들이 모두 맛있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내겠다고 결심하면 그 결심을 지키기 몹시 어려운 것과 비슷한 걸까. 착해 보이고 싶을 때도 있고, 못되어 보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나로 보이고 싶지 않고 오늘 솔직하게 되는 대로 살고 싶다. 착하다도 못됐다도 행동에 따른 그때그때 당시의 다른 사람의 평가일 뿐 본질이 되진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