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그리고 고통과의 관계
다양성과 혼종성이 공존하는 라틴아메리카, 이곳은 어떤 곳인가?
콜롬비아 비평가 Marta Traba는, 라틴아메리카를 “열린 나라, 닫힌 나라”로 정의했는데 이와 같이 라틴아메리카를 두 가지 부류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열린 나라로서의 라틴아메리카는 스페인, 포르투갈의 정복의 시대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문화를 선호하고, 독립 이후에도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는 부류이고, 닫힌 나라로서의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의 모방에서 벗어나 원주민 토착문화 속에 그들만의 정체성을 재발견하여 그들만의 특성을 갖고자 하는 부류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류는 각 나라마다 겪게 되는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상이하게 나타난다.
불꽃과 같은 프리다 칼로, 그의 동반자 디에고 리베라는?
디에고 리베라는 1886년 멕시코의 천재화가이다. 그는 20세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함께 만나고 토론을 나누며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21년 유럽에서 돌아온 디에고 리베라는 입체파 경향을 버리고, 민족주의적 뿌리를 강조하며 멕시코의 찬란했던 문명에 눈을 돌렸다. 스페인의 지배하에 멕시코인인인 자신들이 품고 있었던 멕시코만의 ‘정체성’의 자긍심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국민의 80%이상이 문맹자인 그들에게 벽화는 최고의 교육수단이었다. 벽화는 정치인들의 효과적 홍보물로 자리했고, 그들과 손잡은 화가들에게는 든든한 재정이 지원되는 등 국민들을 계몽시키고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디에고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민족주의자로 그림을 판 수입은 문화재를 보수하거나 유물들을 사들이는데 사용했다. 프리다는 그런 그를 지지했고, 멕시코 혁명이 고대 아즈텍 마야 문명의 발생지인 멕시코에게 새로운 세계적인 문명을 부활시킬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화운동의 세 명의 거장 중 한명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옥수수가루를 파는 여인, 백합을 파는 여인 등 흔히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그린다. 또한 아즈텍족의 신상에 무릎을 끓는 모습, 해골과 인간이 혼재된 모습을 통해 원주민의 사상, 우주론, 의학, 문학 등의 호기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원주민의 모습이 너무도 일반적이고, 전통적이기 때문에 당시 민중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난도 있다. 오히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나, 다비스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같은 작가들은 민종들을 표현하는데 있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회적 상황을 훨씬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정치권과의 결탁으로 어용화가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멕시코에서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가이기도 하다.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는 기존의 화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 세계와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주목받은 여성 화가이다. 오늘날 칼로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라틴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화가로서 국내외적으로 자서전과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그녀의 삶과 예술을 다룬 전기 영화가 제작 될 정도로 대중적 인지력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뒤 흔든 작가, 페미니즘의 선구자 프리다 칼로, 그녀의 삶을 정의하자면 ‘고통’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 쇠퇴해가는 육체와의 지루한 투쟁이였고, 사랑의 배신속에서도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프리다는 그녀의 인생에서 일어난 두 번의 큰 사고를 이와 같이 표현했는데 아마 이 두번의 큰 사고의 표현이 프리다의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큰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생동안 두 가지 큰 사고를 겪었는데, 첫 번째는 18살 때 전차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와의 만남이었다. 두 사고 중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1907년 멕시코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섯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프리다 칼로는 1925년 9월 17일 멕시코 독립기념일에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남자친구와 함께 타고 있던 버스가 소치밀코 행 전차와 충돌한 것이다. 전차의 철재 난간이 부러져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골반이 관통하여 질로 빠져나왔다. 요추, 쇄골,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고 골반은 세동강이 났다. 왼쪽 다리는 골절이 열한 군데, 오른쪽 다리는 골절된 채 으깨졌다.
사진출처: 구글
그녀는 드로잉과 작품 버스를 통해 그 순간을 회상하고, 작품으로 이를 승화했다. 이 유화에서는 사고 직전 버스에 타고 있던 원주민, 노동자, 중산층, 신사로 구성된 탑승객을 통해 멕시코의 오늘을 표현했고, 버스 밖에 위치한 웃음이라는 가게를 통해 그녀 자신만의 블랙유머를 담았다.
“죽음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나는 죽음을 놀리고 비웃는다”
프리다의 인생을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은 프리다가 끔찍한 사고를 겪은 후, 병상에서 그린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 달라고 디에고를 찾아가면서부터 이루어졌다. 프리다는 21세에 41살이였던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는데, 디에고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했지만 계속되는 유산으로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녀의 작품 프리다와 유산에서는 벌거벗고 눈물을 흘리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꼭 닮은 유산된 아이가 그려져있다. 또한, 헨리포드병원 이라는 작품에서는 디에고의 부재속에서 홀로 유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프리다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진출처: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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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침대, 난초처럼 생긴 자궁(, 빨갛게 물든 태아(디에고가 희망했던), 골반, 기계가 그려져 있다. 빨갛게 물들은 태아(디에고가 희망했던 남자아이), 파랗고 어두운 기계, 눈물을 흘리고 퍼렇게 질려버린 얼굴, 피로 물든 시트, 느리게 가는 시간(달팽이)를 보아도 프리다 칼로의 감정이 절규에 가까웠으리라 추측해 본다. 특히, 그녀의 여 동생 크리스티나와 남편의 불륜은 프리다에게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겼는데, 몇 개의 작은 상처라는 작품에서 그 고통이 배가 됨을 알 수 있다.
사진출처: 구글
이를 계기로 이혼을 결심한 프리다는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지금까지 디에고를 사랑하는데 인생을 소비하느라 쓸모없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디에고를 계속 사랑하면서 동시에 원숭이를 그리려고 한다”라고 하며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시작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시도를 통해 작품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내고자 했다. 아픔이 너무도 많이 묻어나, 그녀의 작품을 보다보면 그 고통이 마치 내 고통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전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숱한 고통속에서 프리다 칼로는 자신과 마주 한다. 그 숱한 고통을 마주하는 일, 그 일은 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