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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hyeonju Oct 19. 2016

딸, 엄마, 며느리

잊지 못한 딸이 있지도 않은 딸에게

  "어머, 그럼 딸만 셋인가 부다."

위로 언니,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저렇게 말한다. 딸 부잣집이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그래, 요즘엔 아들보다 딸이 낫다면서요? 하하. 민망한지 영양가 없는 말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멋쩍게 웃는다. 네, 그러게요.


  아빠는 장남이었고, 남아선호 사상에 길들여진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으로 거슬러가도 명절의 풍경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시골에 가면 (집에서와 다를 바 없이) 아빠는 늘 추리닝을 입고 누워서 텔레비전을 봤고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많지는 않아도 모인 식구들의 삼시 세끼 밥상을 차리고 내오고 치우는 것부터 넓은 집을 구석구석 청소하는 일, 텃밭의 잡일을 돕는 것까지도 엄마의 몫이었다. 그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나이부터, 그것들은 곧 나의 일이자, 딸들의 일이 되었다.


  기름내 맡아가며 부친 수많은 전을 고르고 골라 예쁜 것은 큰 상에 올리고, 개 중에 못난 것들은 따로 모아뒀다가 작은 상에 올렸다. 여기서 큰 상은 남자들이 앉는 상이고, 작은 상은 여자들이 앉는 상이다. 초등학교 때 읽던 한자숙어 책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한자성어를 보고 명절 밥상을 떠올렸으니 알만하다. 가뜩이나 불편한 시골집의 주방에서 찬바닥에 앉아 엄마를 돕고 나면 늘 회의감이 들었다. 고생은 다 해놓고도 좁아터진 상에 앉아 맨 밥이나 먹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마는 '며느리'였다. 엄마는 내가 지금껏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며느리의 도리'란 것에 충실한 사람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은 명절이 며칠이건 고스란히 친가에서 보냈다. 엄마는 당신이 응당 했어야 할 딸 노릇만큼을 며느리 도리를 하는데  쏟는 것처럼 보였다.



 기껏 도리를 다하려고 애쓴 이 맏며느리는, 가끔 약주에 얼큰하게 취한 시아버지로부터 "우리 며느리는 다 잘하는데 아들을 못 낳았다"는 핀잔을 듣곤 했다. 명절을 보내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할 때, 할머니가 명절 음식 꾸러미 안에 군데군데 해묵은 반찬들을 생색내며 담아주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할머니는 드라마에 나올법한 못된 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웃으며 박하사탕을 꼭 쥐어주던 외할머니처럼 따뜻한 어머니는 아니었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다. 명절이 돌아오기 몇 주 전부터 앓는 소리를 하곤 한다. 시댁 식구들은 잘해줘도 결국 시짜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속앓이를 한다고, 그래, 너는 늦게 늦게 가- 한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 누굴 만나 어떻게 언제쯤에나 결혼을 하게 될지 혹은 그렇지 않을지조차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만나는 사람조차 없는 나는, 그럼에도 있지도 않은 딸을 벌써부터 걱정하곤 한다. 결혼을 한다-는 말 한마디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거쳐가는 통과의례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누구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찬찬히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진다.



  여태 맏며느리의 도리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아왔으면서도, 엄마는 지금껏 딸인 내 앞에서 푸념 어린 말을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힘들다는 말도, 지친다는 말도, 서운하다는 말조차도.

  어쩌면 그래서 더 자신 없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불평 없이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딸은, 그러는 동안  불만과 설움을 하나하나 잊지 않고 묵묵하게 쌓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딸이 내 몫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게 될까 봐, 사서 걱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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