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이었던 2014년 내 졸업패션쇼 작품의 주제는 '뿌리'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뿌리 본디의 생김새와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부끄럽지만 당시에 인문학적 소양이랄 게 거의 없었기에 근원부터 탐색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전공 수업의 8할이 옷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언제나 중요한 건 디자인한 것을 실제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기술과 구현이 1순위였다.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스무 살 초반의 기술에 제약을 받았다. '왜'의 맥락을 따지고 파고들고, 함께 나누고 굴리는 시간은 거의 전무했다.
돌이켜보면 옷을 위한 옷만 가득했지 사람은 없었다. 4개의 팔다리를 가진 신체, 그중에서도 특정 사이즈만이 기준으로 혹은 전부로 다뤄졌다. 그보다 사지 개수가 적거나 길이가 다르거나 등이 굽거나 걷지 못하는 신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드는 사람의 마음도 예외는 없었다. 유명한 디자이너와 안정적인 취업. 그 외의 다른 기회들 다른 가능성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 입을 옷을 만들러 갔지만 사람 배울 일은 드물었다. 우리가 살았던 이야기, 살고 있는 이야기,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별생각 없이 주제로 잡은 저 뿌리를 만드는 과정이 처음으로 되고 싶은 나가 아닌 지금까지의 나, 현재의 나를 관찰하게 했다. 함께 한 사람들 역시 보게 했으나 어디까지나 가족, 친구와 지인 그밖에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졸업 후엔 6년 반 동안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VMD로 근무했다. 평생 패션 비즈니스 업계에서 늙을 때까지 일하기를 소망했다. 옷을 좋아했고 그 옷을 입고 행복할 누군가를 떠올리는 게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넘치는 신상품과 새롭게 만들어지는 재고 덩어리가 버겁기 시작했다. 그 위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에 산처럼 쌓인 옷무덤들이 겹쳐졌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사는 오염된 땅, 물, 노동환경이 눈에 밟혔다.
지금 당장 어떤 옷 소재든 지구와 사람에 무해한 과정으로 썩게 만들 기술을 만들지 못할 바엔 적어도 가담은 하고 싶지 않았다. 리테일 공룡이라는 기업이 무한정 찍어내는, 옷을 위한 옷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사람들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직업과 헤어졌다.
우주 宇宙
宇 집 우 宙 집 주
우주적(宇宙的) 식사
천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우주를 떠올리면, 그것은 나의 아득한 바깥 같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그려보면서도 그 까마득한 거리에 압도당한 뿐, 내가 그 안에 포함된다는, 닿아있다는 안락을 감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자어로 우주는'집 우(宇)'에'집 주(宙)'를 쓰는, 인간의 가장 큰 거처이다. 우리는 태어나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그 다정한 무한에 기대 소멸한다. 되도록 우주적이고자 하는, 이서의 표현에 따르자면 '가장 집다운 것'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그러므로 지극히 근본적인 생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어쩐지 우주처럼 고독한 것이다.
목정원(미학자)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주적 상상력을 품은 '이서재'라는 18평 한옥에서 '우리의 뿌리'를 마주한 건 우연일지 아니면 뿌리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필연일지 궁금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때 다 보지 못했던 뿌리가 보였다. 대한민국,우리였다. 거저 얻어진 이름이 아닌 우리의 땅과 이야기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한지 위로 그어진 산과 물줄기를 눈으로 좇으며 듣는 이야기가 묵처럼 스며들었다.
가장 안쪽부터 순서대로 안동, 영월, 제주, 울릉지리이다.
선비의 도포색을 닮은 안동지리지는 정신을 지키기 위해선 일종의 그릇이 필요하고 그게 곧 형식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회마을이 물줄기로 감싸인 것처럼 말이다. 별신굿놀이와 쥐불놀이가 달리 보였다. 하회마을의 아침과 병산서원의 여백도 보고 싶어졌다.
단종의 도포를 닮은 붉은 영월지리지 첫 장에 뜬 서쪽 해는 더 이상 끝과 죽음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과 균형 음과 양의 조화를 들려줬다. 헤아림 많던 선조들은 보란 듯이 이야기로 단종을 살려냈고 그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검은색일 수밖에 없던 제주지리지 안에는 기호들이 떠다녔다. 영원히 메꿔지지 않을 구멍들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부표였다. 새끼 오름들을 품은 한라산과 수면 위로 서로 맞닿은 태양이 위로처럼 들렸다.
파란 울릉지리지의 가장 첫 시작에는 새까만 독도가 반짝이고 있었다. 울릉도민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섬도 '우리'라는 이름 하나로 애지중지 보듬고 지켜왔다. 그 덕에 독도는 우리땅이 될 수 있었고 '우리것'이라 부르는 기쁨을안겨줬다.
요즘은 울릉도민이 '내 집'을 지켜온 태도 같은 게 종종 불편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필연적인 번거로움과 느림이 물러난 자리엔 언제나 소외가 자리한다. '안' 할 수 있는 게 많아질수록 사색할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이전보다 넓어진 세상을 더 자유롭게 누리지 못한다. 이서재에 머무르며 왜 우리에게 다시 수고로움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소중함을 지킬 때 발생하는 불편함은 혼자선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 지켜야 할 생존 법칙이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마당처럼, 사라진 불편함을, 마땅히 해야 할 수고를 다시 감내할 때 우리 존재도 다시 열린 집 사람 살 집이 될 것이다. 태도가 일상이 되고 일상이 예술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의도적인 여백이 필요하다. 몰라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
2024. 11. 10 이서재
이서재 안에 쭉 뻗은, 부정 해도 부정당할 수 없는 사실들을 보니 다시 일상을 지킬 힘이 났다. 역시 사람은 힘들어지려 할수록 크게 봐야 한다. 내가 대단한 나라에서 자랐다는 걸, 나 역시 대단한 뿌리를 지녔다는 걸 떠올리면 다시 일어서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 근간이자 그릇으로서 어엿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내게 더 이상 동쪽에서 뜨는 해와 서쪽에서 지는 해가 다르지 않다. 모두 하나이다.우리의 작별과 만남의 인사 또한 모두 하나였다는 말씀을 떠올리며 안녕을 나누었다.
대나무 이파리가 속살거리던 우주 밖을 나온다. 마음은 다려지고 어깨는펴져있다. 인왕산등성이를 지긋이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