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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HOLIDAY Jul 01. 2023

징그럽게 현실적인, 그래서 더 아름다운 동화

영화 <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리뷰

 


우리는 흔히 현실과 대비되는 세상을 ‘동화’라고 표현한다.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동화 같다’며 감탄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사실성이 결여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보고 비꼬듯이 ‘동화 속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동화를 동경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동화 속 세상을 깔보며 살아가지만 그 둘은 공통적으로 ‘현실’과 ‘동화’를 구분한다. 그러나 영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현실과 동화라는 두 세상을 모두 담고 있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징그럽게도’ 현실적이어서 더 아름다운 동화가 되었다.


 동화는 더욱 그렇다. 앞서 말했다시피 동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머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런 동화에 ‘진짜’ 현실을 덧붙여 더욱 현실성을 불어넣었다.




 이 작품이 ‘징그럽게’ 현실적인 첫 번째 이유는 일차원적으로 정말 징그럽고 기괴하게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CG를 최대한 배제하고 스톱모션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작품의 비하인드를 모아 놓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장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인형들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장면에서는 감독의 키보다 높은 피노키오 머리를 촬영에 사용하기도 했다. 인형들을 미세하게 손으로 조정해가며 촬영했기 때문에 실제 목각인형이 살아난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피노키오가 제페토가 처음 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잠깐, 이게 전체 이용가라고?’ 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가 먼저 떠나보낸 아들 ‘카를로’를 모델로 만든 인형이기 때문에 열 살 꼬마의 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생명을 얻은 뒤 처음으로 걸어 보았기 때문에 팔과 다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었다. 비틀거리고 허우적거리며 위태롭게 움직이는 그 모습은 ‘걷는’ 행위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마치 갓 태어난 기린이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피노키오의 경우 ‘살’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특유의 뻣뻣함과 목재가 만들어내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기괴함을 자아냈다. 피노키오의 행동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지만 그가 걸음마를 떼는 과정에서 제페토가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 기괴함은 배가되었다. 참으로 ‘현실적인’ 목각 인형의 탄생 장면이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현실적인 두 번째 이유는 시대상의 설정이다. 동화 피노키오에는 구체적인 시대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시대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제페토는 1차 세계대전에서 성당이 폭발하면서 아들을 잃었다. 또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이런 시대 배경을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인물이 바로 포데스타 시장이다. 포데스타 시장은 제페토가 살던 마을의 대장장이 출신으로 극의 초반에 잠깐 등장한다. 이후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열렬한 파시스트 성향의 시장이 되어 다시 등장한다. 포데스타 시장은 피노키오를 말 그대로 불멸의 파시스트 용사로 육성하고자 한다. 또한 그의 아들 캔트윅 역시 파시스트 용사로 키우고자 가혹하게 훈련시킨다. 적의 공습에 방독면을 배급받는 어린 소년병들의 표정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어쩌면 ‘미치광이 파시스트’라는 평면적인 인물로 소비될 수 있는 이 인물을 피노키오의 대사가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있잖아, 모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빠들도 절망할 때가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그때 하는 말들은 그 순간에는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전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돼. 진짜 심한 말을 할 때도 있어. ‘짐’이라든가, ‘겁쟁이’라든가. 하지만 속으로는 아이를 사랑해.


 피노키오의 말을 듣던 캔트윅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뭉클함과 동정심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둘의 최후까지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과격한 파시스트 정치인도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점,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들에게 관객이 동정심을 느꼈다는 점이다. 감정을 이입하고 싶지 않은 대상에게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 영화에 선역과 악역이 없다. 때 묻지 않은 아이와 세상의 무서움을 겪은 어른들이 나올 뿐. 권선징악이 명확한 동화에 익숙한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감독의 연출 방식이었다. 




 이 영화가 현실적인 세 번째 이유는 위 문단의 대사와 이어진다. 바로 솔직하지 못한 제페토의 모습이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극의 초중반까지 제페토는 카를로와 다른 피노키오의 모습에 화가 났다. 피노키오 역시 ‘저는 카를로가 될래요!’라고 했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피노키오를 경계했으며, 그들의 세상에서 피노키오의 순수한 행동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제페토의 모습은 자신이 꿈꿨던 이상적인 자녀상과 실제 자녀의 모습의 거리감에 실망한 부모와 비슷하다. 피노키오는 부모를 만족시키는 자녀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 절망하는 현실의 우리와 닮아 있다. 특히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짐’이라고 말하고 화를 내면서 ‘아버지의 거짓말’을 한다. 피노키오는 코가 길어지지 않은 제페토의 모습을 보고 상처를 받는다. 아버지는 진심과 다른 표현으로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아들은 자신의 전부인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고 절망한다. 당신이 부모이든 아니든 간에 제페토의 모습은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 피노키오보다 먼저 세상의 풍파를 겪은 제페토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현실을 핑계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도 하고 어쩔 때는 실제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갈피를 못 잡기도 한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해 관계가 틀어지는 제페토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와 너무나 닮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측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실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제페토와 피노키오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알 수 없지만 세바스티안의 내레이션과 함께 축약된 작품의 후반부에서도 실수, 후회, 반성은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제페토처럼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해 자신 또는 남에게 상처를 준다. 이 실수를 후회하고 반성하고 극복하고자 하지만 언젠가 또다시 우리는 실수한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이 결점들은 보완을 거듭해 언젠가 완전히 극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유한하다. 유한한 삶에서 ‘결점’을 ‘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축복일 수도 있다. 삶의 시간 동안 실수, 후회, 반성을 반복하다가 죽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생이 아름다운 진짜 이유가 아닐까. 작품 말미의 크리스티안의 대사는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 아이도 결국은 죽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아이인 거겠지.


 기예르모 델 토로가 스톱모션을 고집한 이유는 우연히 발생하는 ‘실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컴퓨터그래픽은 제작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과 생김새가 매끄럽지만 오히려 너무 매끄럽기 때문에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피노키오의 인물들의 생김새는 누가 봐도 인형이지만 그 움직임은 사실적이다. 카를로가 비행기를 보고 신나서 집에 들어올 때, 문을 한 번에 닫지 못해 두 번에 걸쳐 닫는 모습은 이 영화의 사실적인 움직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구성과 연출, 스토리 등 영화의 모든 요소를 통해 관객에게 ‘실수가 있어 인생은 더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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