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25주년 베스트 앨범을 들으며
크라잉넛을 이야기하자면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빼놓을 수 없겠다.
다들 마의 중2 시절을 어떻게들 보내셨는지?
나는 코 묻은 돈으로 홍대를 뽈뽈 돌아다니며 1세대 인디밴드들의 공연을 보던 놀랍도록 조숙한 시간을 보냈다. 교복을 입고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에 놀러 가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동네 실용음악학원에서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따라다니고.
딱 한 번만이라도 저 별을 따다 준다면 거어어짓말이었대도 저 별을 따다 줄 텐데. 이 대목에서 들려오는 베이스 기타 소리가 그 어린 나에겐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렸는지.
(아참, 10년이 넘도록 내 베이스 실력은 지금까지도 밤이 깊었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그 시절 크라잉넛은 내게 우주 제일 슈퍼스타였다.
사람은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전성기 시절 음악과 패션을 평생 좋아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내게 전성기는 베이스 기타를 메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그 시절이었는지,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늘 밴드 음악이었다. 밴드의 시대 같은 프로그램이 유행해 이런저런 밴드의 노래들이 TV에 나올 때면 몇 번이고 다시 보며 행복해했고 요즈음의 트로트나 랩 일색의 경연 프로그램엔 노력해봐도 취향을 붙이지 못해 결국 TV를 끄곤 한다.
그러고 보면 막차 시간이 임박해 헤드라이너였던 크라잉넛을 못 보고 울면서 집에 가던 내가 밴드 덕후 디엔에이를 간직한 채 통금에 한이 맺힌 성인으로 장성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아무튼 사람은 안 변해’ 이론의 증명이랄까. 헤드라이너를 넉넉히 보고 잠실에서 용인까지 집에 갈 택시비를 지참한 어른이 되었지만, 나의 크라잉넛 오빠들은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에도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수도방위사령부의 빨간 유니폼을 입던 그 젊었던 오빠들이 이제 (대부분) 유부남에 마흔 넘은 아저씨들이 되었을지라도, 예전보다 말을 천천히 달릴 지라도 여전히 철없어서 나는 그들이 좋았다.
그래서 종종 크라잉넛 노래를 챙겨 들었었다. 그때처럼 매일이 아니더라도, 배고프거나 춥거나 서럽거나 뭐 아무튼 지금의 내가 좀 불쌍할 때, 연인보다는 은인이나 영웅이 필요한 순간에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유튜브 뮤직에서 내 취향에 맞춰 자동 재생된 크라잉넛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딴짓하며 흘려듣기에도 내 기억과는 디테일이 달랐다. 의아해서 핸드폰 화면을 보니 그 크라잉넛이, 어느새 25주년을 맞아 기념으로 앨범을 발매했더라.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고 자랑하기라도 하듯 세련되어진 연주와 부족했던 부분의 채워짐, 그리고 약간의 장난들을 치는 여유까지. 중학생이 직장인 10년 차가 되는 동안 꾸준히 할 일을 해온 크라잉넛이 참 고마웠다.
나는 이렇게 지금처럼 크라잉넛이 오래오래 노래해줬으면 한다. 우연히 들려온 음악에서 내 어린 나날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닫아둔 추억의 서랍이 자주자주 열리도록.
내 전성기의 처음과 끝에게, 그들에게까지 가 닿지는 않겠지만 이 글을 바친다. 이제 통장과 신용카드도 바칠 수 있는데, 요즘은 공연을 볼 수 없어 아쉽다.
그나저나 오빠들이 마흔이 넘는 동안 나도 서른이 훌쩍 넘었다. 내 젊음아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나를 두고 떠나가지 마라. 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