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날씨 편 1
2020년은 작년과 다르게 정말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왔다. 타 지역은 엄청난 강수량에 논과 밭이 잠기고 토사에 경작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농부가 흙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돌을 골라냈을 터인데 굵은 강 자갈돌로 덮여버린 밭을 보면서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강화도 그리고 내 농장은 괜찮을까? 아직 장마전선이 중부지방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농장이 돌밭이라는 것이다. 작년부터 나를 괴롭힌 돌들이 땅 깊숙이 많아서 배수는 걱정 없겠거니 생각했다. 어느 날 경기북부에 호우경보가 내려졌고 실제 엄청 비가 많이 왔다. 하지만 정말 빗물이 고이지도 않고 바로 콸콸 어디론가 사라졌다. 배수로가 없는 땅인데도 말이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다? 갑자기 독특한 연상작용이 일어났다. 어떤 매개를 통해 시간을 넘나 든다.
90년도 초등학생 1학년 때다. 한 여름 옥상 시멘트 바닥의 열기에 잎을 잔뜩 쭈리고 있던 땅콩들을 봤다. 물을 빨리 줘서 살려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빨간 장화를 신고 몸통만 한 물통에 한가득 물을 채워 옥상 계단을 낑낑거리며 올라갔다. 매일 땅콩에게 물을 주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 당시 학교생활을 참 따분하게 생각했다. 집에서 물 주기는 틀에 박힌 무료한 수업을 들은 보상과도 같았다.
그리고 알 수 없이 우울하게 변해버린 집 분위기 속에서 가을에 수확해서 온 가족들과 함께 같이 먹겠다는 미숙한 사명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엄마와 나만 먹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기억나지 않는다. 왠지 엄마가 말도 없이 어느 날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도로가의 인도를 같이 어색하게 걷고 있었다. 도로 옆으로는 논이 있었고 물속의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개구리와 비. "비가 오려나?"
그때 그 어린 꼬맹이가 뭘 알았겠느냐.. 왜 집이 우울하게 변했는지. 그 당시는 왜 그렇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고통스러운 뇌는 그 구간의 기억을 지운 듯하다. 그래서인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났지만 그때 그 꼬맹이가 아직 나의 몸속에 있다.
93년도 비가 많이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반 친구들이 조용할 리 없다. 계속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고 순간 선생님이 말했다. “비오는 날이었어. 어느 학교 경비원이 밤에 학교를 순찰했었어. 어느 반을 지나는데 아이들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거야. 그래서 이상해서 소리 나는 반의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지. 두려움이 몰려왔었대. 너희들 지금 떠드는 소리가 빗방울에 맺히게 돼. 밤에 빗방울이 땅이 떨어져 흩뿌려질 때 빗물에 갇혀있던 아이들 소리가 퍼져 울리게 될 거야. 비가 오는 날은 조용히 하는 거야.” 선생님 말에 순간 숨 멎을 것 같았다. 기괴한 이야기였고 빗물에 대한 두려움을 처음으로 느껴 본 순간이었다. 순진한 마음을 가진 때였다.
큼지막한 빗방울이 코 끝을 치고 달아난다. 정신이 돌아왔다. 눈 앞에 사물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아 다시 비가 내리려나보다.”
하늘은 어두컴컴해지고 폭우의 기운이 느껴진다. 한 묶음의 바람이 휙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무섭게 내리는 비였다.
비가 내리는 날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마치 비닐하우스가 북이 된 마냥 울림통이 되어버린다.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나. 묵직한 저음에 온 몸을 맞는다. 우퍼음 가득 시끄러운 클럽에 몸을 던진 느낌이다. 몸을 마구 파고든다. 음파는 곧 에너지. 야자나무들에게도 에너지를 전달할까? 비가 오는 날은 농장의 대축제라고도 해도 되겠다.
비만 오면 감성에 빠져서 멍하게 있는 순간이 많아졌다. 농장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비닐 포트와 흙 뭉치들이 많은데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비를 피할 동안에 청소라도 하자. 눈이라도 편안하게. 다시 현실이다. 땀 한줄기가 이마로 쭉 흘렀다.
“연못도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비 오는 날 그거 보겠다고.."
" 비단잉어도 풀어놓고 송사리도 연못에 풀어놓고.. 부레옥잠도 띄워두고.. 그러면 비 오는 날 개구리도 놀러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