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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래빗 Jan 08. 2022

나의 스토리, 나의 빈티지

래빗노트 100호 특집 사설

10여 년 전, 나는 LA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미국은 리먼 브라더스 금융 사태 이후 조금씩 경기가 좋아지던 시기였고, 한국인 이민자가 만든 SPA 브랜드 FOREVER21의 성공으로 한인사회는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내가 방문했던 의류공장들은 대부분 빈티지 스타일의 옷을 만들고 있었다. 서핑과 태양을 즐기는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그런 옷들 말이다. 지금은 패션에서 메가 트렌드가 사라졌지만 이 때는 이런 빈티지 컨셉 브랜드들이 인기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옷차림을 읽고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게 나의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원래 빈티지 컨셉이 아닌 브랜드들도 하나둘씩 이런 스타일의 옷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MD로 있었던 브랜드도 일부 운동화와 티셔츠에서 빈티지 기법을 이용하여 상품을 만들었다. 부산에 있는 신발 공장 사장님은 왜 멀쩡한 신발을 물에 빨고 사포로 긁으라고 하냐고 펄쩍 뛰셨다. 매장 매니저들도 이렇게 송곳으로 다 뜯어 놓은 티셔츠들은 클레임감이라고 못 판다 그랬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던 빈티지 제품의 판매는 어땠을까?


예상대로 폭망이었다. 물론 기술력도 어설펐지만, 그건 원래 우리 브랜드의 컨셉이 아니었으니 소비자들도 외면했던 것이다. 미국의 빈티지 브랜드는 서핑하고 나온 사람들에게 필요한 슬리퍼,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급격히 떨어지는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제법 두툼한 반바지, 언제든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후드 집업, 낡은 듯한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햇빛과 주변 환경 등이 모두 어우러지는 브랜드 스토리가 있었지만 우린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때 알았다. 시류에 편승하여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얄팍한 매출을 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 값진 경험으로 남았다. 그 후 나는 내 스타일이 아닌 것,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은 의식적으로 과감하게 버렸다. 나에게 집중하다 보면 저절로 창의적인 결과물들이 나오고 나만의 스토리가 된다. 그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며 기쁨과 슬픔을 겪어보는 게 인생의 재미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나만의 스텝으로 나답게’를 강조한다. 잘되는 남의 것을 베껴봤자 그 틀을 넘어설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게 좋아 보이니 그걸 쫓아가야 한다.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이도 저도 남는 게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간다. 자신의 본질이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지 깨달을 시간을 놓친다는 게 가장 아쉽다.      



빈티지란, 소중한 낡은 것을 말한다.
내가 지금부터 만드는 모든 스토리는 나만의 빈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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