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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lidayreading Jun 26. 2021

2021, 첫 휴가 일지

1. 2020년 2월 회사를 창업하고 바쁘기도 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다보니(?) 제대로된 휴가를 보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휴가란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게 맞겠다. 작년 겨울 팀장급 직원 1명도 추가로 채용했겠다, 직원이 없을 때야 우리끼리 일하고 우리끼리 쉬면 되었지만 올해부터는 연차도, 휴가도 제대로 정해서 활용하기로 한터라 바빠질 본격 성수기 영화 시즌 전에 6월에 쪼개서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다. 회사를 시작하고 첫 휴가라니. 



2. 월요일 아침. 사는 지역에서 부산까지 직행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대전으로 먼저 향했다. 월요일 오전에 대전까지 가는 고속버스가 막히기도 하는구나. 다들 각자의 일상에서 치열하게 움직이는구나. 여유로울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기차를 놓치지는 않겠지. 그래도 조금 여유롭게 시간을 정해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 하나 지웠을 뿐인데 어쩐지 진짜 떠나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어딘가로 떠나는 것보다 가장 필요한 건 디지털 디톡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일주일만 살아보자 가볍게. SNS는 해야하는 시간에만 하고 - 주말과 저녁 시간에는 끄고 차라리 그 시간에 영화와 책을 읽자. (트렌드 경향 파악한다는 핑계 대지 말고) 먼저 내가 살아보고 정리해보자. 무심결에 누른 수많은 클릭들에는 진짜 이야기들이 없다.  



3. 나도 나의 서른일곱은 처음이다. 개인적인 미련은 많이 내려놨고, 상처도 덜 받는다. 어색해진 관계를 억지로 봉합하려고 하지 않는 내가 좋다.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나를 더 걱정없이 비워야겠다. 더욱 말을 하지 말아야 겠다. 정말로 그런데 이상하게 많이 비워졌다. 벌써 채우고 싶단 생각이 들다니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욱 비우자. 할 게 없을만큼 비우자. 그러다보면 그 끝에 내게 남아있는 감정이 무언지 찾게될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4월의 어느날, 나는 소설을 쓸 수 있겠다라고 마음 먹은 그 날처럼 나에게도 기적처럼 이제는 글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어떤 계시가 반짝이는 시간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4. 곧 이 직업을 갖게 된지 꽉 채운 10년을 맞는다. 2011년 8월 11일이 내가 일을 시작한 날이었다. 신입 사원 때는 정말로 인생 최고의 위기였다. 많이 울었고, 많이 혼나고, 많이 힘들었다. 그랬던 내가 하반기 부터 이 직업을 지원하는 친구들을 위한 강의를 맡게 되고 때로 이미 꼰대가 되어버려 후배들을 위한다며 괜한 잔소리를 한다. 여전히 이런 내가 아직은 어색하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만족스러운 건, 내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흐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떤 상승 곡선을 타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는 거다. 난 온통 다 늦었지만 하나씩 계단을 밟고 남들은 모르게 나 혼자 조금씩 나아간다. 가끔은 내가 내 스스로의 멱살을 끌고 이렇게까지 오고있다는 생각도 한다. 누구도 나를 끌어주지 않는데 그 원동력이 무얼까. 



5.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일은 무엇일까...김영하 작가는 첫번째가 작가, 두번째가 여행자라고 하던데. 당황스럽지만 점점 나를 알아갈수록 나의 정체성 1번은 영화마케터. 정체성 2번은 성장하고 싶은 사람. 나아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같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 나아짐이라는게..돈은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부분이고,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내가 얻고 싶고 지금 느끼는 성장은, 내가 결정하는 자유다. 내 방향을 내가 결정하는 것.. 내 삶을 결정하는 중심이 내가 되고, 옳은 결정은 없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최선의 결정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순간 내가 믿고 있는 사명이라면 사명. 믿음이라면 믿음. 그 순간의 진심이라면 진심대로. 내가 믿고 따라가고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지금의 삶이 내가 "나아지고 싶은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이토록 천착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망하게 될지도, 잔뜩 실패로 가득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단순 취미가 아닌 돈을 벌고, 자아를 성취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만들어간다는 게 지금의 삶을 만족하는 이유라는 결론을 내렸다. 



6.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된 새로운 나의 모습은, 나는 영상 속의 나를 절대 못본다는 거다. 얼굴이 나오면서 말하는 영상 말이다. 종종 공부하거나 일하는 타입랩스 영상은 찍어보곤 했었지만 특히, 내 얘기를 하는 영상은 도저히 못보겠다. 최근에 인터뷰를 할 일이 있어서 영상 인터뷰를 했고, 그땐 수월하게 잘했다. 편집된 완성본을 보내주셨는데 내 첫 얼굴이 나오자마자 스킵을 해버렸다. 도저히 못보겠다. 이건 오그라드는 감정과는 다르다. 사실 어떤 곳에서 강의 의뢰를 주셔서 그 영상도 유튜브에 떡하니 올라와있는데 난 여전히 그 영상이 너무 무섭고 플레이를 할 수 가없다.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두렵고, 나의 어색한 모습이 탄로나 보일까봐 그런거 같기도 하다. 이러면서 무슨 유튜브를 한다는 거야. 아무래도 유튜브를 하게 되도 얼굴은 빼고 목소리나 영상으로만 담는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내 이야기가 어떻게 편집될지,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이 어떻게 나올지 진심으로 두렵구나 이 영상이라는 게. 



7. 이번 여행에서 어릴 때 꿈꾸던 조각들을 하나씩 채워가는 게 인생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홀로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우선 남편이 휴가를 낼 수 없는 상황이였고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워낙 일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과 긴장감을 가지고 통화하고 일하다 보니 정말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호캉스를 생각했고, 다소 비용을 무리해서 해운대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조식 포함 1박을 예약했다. 오래된 호텔이라 예전만큼의 명성은 없지만 대학생 때 매년 영화제로 부산을 왔을 때, 게스트하우스나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에서 수십명이 함께 비집고 자던 시절, 해운대 백사장 앞에 앉아서 저런 곳은 어떤 사람들이 가서 자는 걸까. 나도 언젠가 저런 곳에서 자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 호텔에 묵고 이렇게 호텔에서 쉬고, 조식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보니 어릴때 막연히 바라던 일들이 이뤄질 수 있겠다는 별거 아닌 성취감이 생겨서 마음이 기쁘다.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아주 작은...어릴 때 바라던 일들을 이뤄가는 행복으로 채워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더 바라던 것들을 찾아보면서 도장깨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삶이 조금은 더 흥미로워진다. (어쩌면 돈이면 쉽게 해결 되는거고, 사실 왠만한 직장인들 아주 살짝만 무리하면 올 수 있는 비용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겐 큰 비용 부담, 가치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는 부분이이게) 



8.  휴가이긴 했지만 사실상 수요일 오후부터 목금은 사실상 완전히 분리되지는 못한 채 일을 했다고 봐도 무방한 일정이었다. 수요일에 갑자기 클라이언트로부터 작품 하나 모니터링 요청이 와서 바로 봤고, 내가 반드시 봐야하는 계약서, 예산안 등이 있었기에 검토해야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 또한 내가 자유롭게 검토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만족스러웠다. 반드시 회사에 앉아서 일을 하지 않아도, 몇시까지 회신주겠다는 의견을 내가 낼 수 있고, 누구의 눈치 없이 자유롭게 일을 검토한다는, 앞으로 이와 같은 다양한 일의 방식이 더 활성화 될 것 같아 기대된다.  



9. 코로나가 아니였다면 분명히 또 어딘가 해외를 방랑하고 있었겠지만, 코로나 덕분에 국내 여행을 하고, 또 집에서 디지털 디톡스하며 고요하게 머물 수 있었다. 적어도 해외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어떤 즐거운 긴장감과 색다른 해방감은 덜했지만 진심으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걱정 한톨 없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순간들을 조금씩 마주할 수 있었다. 그 힘으로 또 하반기를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지. 내년 휴가엔 또 어떤 도장깨기와 혼자의 시간을 보낼지 기대된다. 오늘 가장 젊은 날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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