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17, 스페인 바르셀로나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길을 걷고 있었고, 눈 앞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짓거나 혹은 홀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이 도시를 자연삼은 비둘기들이 사람들의 장난을 못 이기는 척하며 받아주고, 그런 비둘기에게 사람들은 빵과 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미소 앞에서 너에게만은 언제고 져주겠다는 듯,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젊은 아버지도 있었다.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은 깨끗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 물줄기에서 튀겨져나오는 방울들을 기꺼이 맞으며 웃고 있었다.
그 골목을 지나쳐 대로로 나와서 걷고 있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찍겠다는 생각 없이, 카메라를 대로변에 들이대면서. 그렇게 셔터를 누르려던 찰나,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다르게 흘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나의 시간은, 평소보다 반박자쯤 느려진 나의 시간은 내 뇌에게 같은 시간이었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게 했다. 일단 저쪽에서 발생 가능한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파리 테러에서처럼 총과 칼을 든 무장 괴한들이 뛰어다니고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폭발물이 발견되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지난번과 같은 방식으로 또 차량 테러? 두 번째로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도로 위 건물들 중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까르푸같은 마트냐 아디다스 같은 매장이냐, 호텔 로비냐 아니면 간이 식당이냐... 마트는 사람이 많으니까 괴한들이 들어가지 않을까? 이 대로변에 있는 간이 식당은 표적이 되기 딱 좋은 곳이지. 사람들이 밥먹느라 긴장을 풀고 있지, 유리문들은 활짝 열려있지... 호텔은 럭셔리함의 상징이니 표적이 되기는 좋지만 입구가 좁다는 단점이 있어. 잠가놓으면 괴한들이 유리문을 깨서 들어오려는 시도까지는 하지 않을 거야. 왜냐면, 테러 다음날이라 이 도시에 경찰들이 많거든.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면 좀 더 가능성이 높은 타깃을 고르겠지. 그래. 호텔로 들어가자.
그렇게 허겁지겁 호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고 내 앞의 주황색 원피스를 입은, 통통한 스페인 여자 역시 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동 유리문을 통과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호텔 지배인과 카운터 직원을 지나쳐 호텔 로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용도 모를 이상한 구석 쪽으로 일단 달려갔다.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어요. 뭔 일이 났나봐요!"
나와 스페인 여자의 영어와 스페인어로 마구 던져대는 상황 설명에 검은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흰머리의 지배인은 유리문 너머로 바깥을 보더니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러더니 뒤로 돌아 다른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로 무언가를 설명하며 웃었다. "테러인가요?" 나의 질문에 그는 두 손으로 X자를 만들더니 "라이트 윙, 레프트 윙, 파이트!" 라고 했다. 오늘 시위가 있었는데, 좌익과 우익 시위대가 중간에서 충돌했고 그 소리에 놀란 관광객들이 도망을 간 거라고 누군가 영어로 더 설명을 해 주었다.
커트 보네컷의 단편소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남자가 낚시터에서 낚시를 하던 중 옆에 있던 농부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는데, 그는 당연히 그 남자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사가 와서 약을 놓고 응급조치를 하자 살아난다. 그 남자는 - 최근 아내의 죽음으로 죽음과 시간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던 그 남자는 - 농부가 깨어나기 전 의사에게 묻는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이 무엇을 보냐고. 정말 이승, 혹은 과거로 다녀오는 경험을 하는 게 맞냐고. 그러자 의사는 작은 쪽지에 무엇인가를 적어서 남자에게 건넨다. 그러면서 말한다. "남자가 깨어난 뒤 직접 물어보고나서 이 쪽지를 확인하쇼. 아마 정확히 거기 적힌 대로 말할거요." 농부가 드디어 깨어나자 남자는 농부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보는데, 농부는 '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어요' 라고 말한다. 쪽지에 써 있던 그대로였다.
나에게는 그 순간 인생 전체가 스쳐지나가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음의 위기라는 하나의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의 늘어남을 경험하는데 그 늘어남의 정도는 위기의 경중에 달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직접 죽음이라는 사건을 눈 앞에서 맞닥뜨리거나 내 신체적 위협으로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아주 조금 느려진 것이었고, 죽음을 직접적으로 아주 가까이서 경험하게 된 사람들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려져서 온갖 생각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이는 또 한 번의 나의 죽음을 아주 멀리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5년 전쯤의 과거를 기억하게 했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던 어느 날, 동네 친구와 동생과 함께 셋이 한강에 자전거를 타러 갔다. 한강에서 3000원을 주고 자전거를 빌려서 오랜만에 바람을 맞으며 달리니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노래를 흥얼거리다 스스로의 흥을 못이겨 나는 아이폰에 이어폰을 꽂고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주로 힙합 클럽에서 나오는 음악들이었던 것 같다. 박치이면서 비트에 맞춰 어설프게 페달을 세게 밟으면서, 신나서 한껏 웃으면서.
그러다 갑자기 한강 가까이서 달리고 싶어져서 자전거도로에서 차들이 주차되어있는 공터 쪽으로 자전거를 돌렸는데, 은빛 고래같은 커다랗고 미끈한 무언가가 내 눈앞에서 반짝 하며 빛나더니 '쿵' 소리와 함께 나는 넘어졌다. 은빛 고래는 기아차에서 나온 K시리즈 중 하나였고 나는 자전거와 함께 옆으로 쓰러져있었다. 다리가 쓰리고 팔꿈치가 아팠다. 다행히도 차에 깔린 신체의 일부는 없었고, 자전거가 부딪히면서 그 충격으로 넘어진 것뿐이었다.
다만 그 찰나의 순간, 내가 차와 부딪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부딪히던 순간, 그 순간 내 눈 앞으로 불쑥 하고 고개를 내밀던 그 은빛 고래는 매우 천천히 내 쪽으로 넘어와서 나는 그 광경을 마치 슬로우모션 비디오처럼 감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고 나는 내가 차에 받혔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이게 뭐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은빛 고래를, 그 아름다운 생명체 아닌 생명체를 나는 감상했다.
그들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나는 그 소란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생각한다. 바르셀로나를 찾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걸어야만 하는 람블라스 거리를, 아무런 경계 없이 걸었을 그 사람들. 그러다 거대한 흰색 밴이 갑자기 눈 앞으로 달려올 때, 가족과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어린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던 그들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을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억겁의 시간을, 무한으로 변해버렸을지도 모를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렇게 영원히 그 찰나의 시간 안에 갇혀버린, 한때는 그 시간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을 잠시나마 생각했다. 오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