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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l Jul 21. 2019

그런 딸

그래도 딸

나는 부모님보다 평생을 못난 상태로 자랐다.




여자는 방앗간 집 셋째 딸이었다. 긴 생머리와 하얀 피부와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큰 키를 가지고 있다. 남자는 개천의 용이었다. 섬 어부의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와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갔다.


남자와 여자는 여행에서 만났다. 친구들끼리 놀러간 여행지에서 남자가 여자의 사진을 찍어줬고, 그걸 준다는 빌미로 서울에서 몇번 데이트를 했다. 깜찍하게도 여자는 그 뻔한 수작에 넘어갔고,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서 영화나 보고, 맛없는 돈까스나 사줬다며 여자는 연애를 회상했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 하나만 보고 시집을 왔다고 했다. 비록 망했지만 그 지역 유명한 기왓집에서 자라난 여자는 처음 남자네 집에 갔을 때 놀랐다. 이렇게 가난했다고? 남자도 없이 그네 집에 인사를 하러 찾아 갔을 때, 둘째 아주버님이 여자를 데려다 줬다고 했다. 아 걔, 하면서. 처음에는 그냥 동네 사람인 줄 알았다면서.


둘은 아무 것도 없이 시작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시작했다. 회사 근처인 서울에 집을 얻을 만큼 돈이 당연히 없어서 외곽 지역에서 출퇴근을 했다. 여자는 1년 동안 몇번의 착각과 고생을 한 뒤 아이를 가졌다. 아이의 예정일이 초여름이라 괜찮겠다 싶었는데, 아뿔싸. 아이가 뱃 속에서 고기를 너무 좋아했고, 임신 중독이 와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 결국 아이가 나온 건 팔월 한 여름. 병원에서도, 여자도 너무 고생하며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다섯살이 되어 그 도시를 떠나며 산부인과에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의사가 잊지도 않고 웃었다고 했다. 그렇게 고생시키더니 이쁘게도 자랐다면서 인사를 했다고 했다. 여자도 남자도 그 고생 때문에 더 이상의 아이는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그래서 하나가 됐다.


남자의 직장에선 꼬박꼬박 월급이 나왔고, 여자는 그걸 잘 꾸려서 덕분에 결혼 십년 차가 되기 전에 신도시의 한 빌라를 분양 받았다. 주인집 딸이 당신들의 아이를 2층 계단에서 밀어도 아무말 하지 못했던 그때를 기억해봤을 때 나름 뿌듯했을 테다. 본인들의 이름을 단 집, 아이의 방과 부부의 방을 제외하고도 남는 방, 같은 나잇대의 아이들을 가진 이웃들과 신규 빌라라 깔끔했던 단지. 아이는 그 어린 맘에도 여자와 남자가 좋아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사하던 날은 그정도로 큰 기쁨이 넘쳐 흘렀다. 그래서 아이가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악기를 사주고 학원도 등록해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가 뭔갈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이는 보통의 아이처럼 약간의 실망과 약간의 사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큰 기쁨을 주며 무리 없이 자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남자는 그 섬에서 손 꼽을 정도로 좋은 머리와 성적을 가지고 있었고, 서울대도 갈 수 있었지만, 집에 돈이 없어 지방국립대 사년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여자 역시 리더십과 좋은 성적으로 여상에서 전교 회장까지 했다.


그래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는 그렇게 예쁘지도 않았고, 키도 여자보다 크지 못했다. 남자는 아이가 어디 이름 높은 대학은 거뜬히 갈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런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자신의 아이니 고만고만한 학생들 사이에 장학금이라도 잘 받을 줄 알았는데, 남자 본인 회사에서 나오는 복지로 꼬박 7학기를 다니더라. 그래도 한번 받은 장학금은 그들의 자랑거리가 됐는데 그 뿐이었다. 교직이수도 안했고, 하여간 하라는 건 죽어도 안했다.


부부는 아이가 대학 졸업 후 이름있는 회사 정도는 다닐 줄 알았다. 근데 하는 일이 대행사. 광고. 본인들이야 부모니 알지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어려웠다. 하고 다니는 꼬라지도 그랬다. 여자는 어렸을 때면 자기 따라다니는 남자가 그렇게 많았다는데, 아이는 또 딱히. 몇번인가 만나는 남자를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다 여자 마음에는 안들었다. 알고 보면 집안이, 알고 보면 회사가, 알고 보면 생김새가. 여자는 특히 아이에게 기대가 많았지만, 제 뜻대로 안됐고, 쥐고 흔들었던 동생들만큼 건들지도 못했다. 그게 부모라면서.



어린 아빠랑 귀여운 나.

암튼 나는 그렇게 자랐다. 키도, 공부도, 직장도 부모님보다 못한 딸.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아이. 평생을 엄마보다 키가 크거나 피부가 좋지 못했고, 아빠보다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직장을 다니지도 못했다. 그래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지만 또 그러지는 않는다. 진짜 못된 딸이죠. 나이가 꽤 먹은 지금도 제 멋대로 산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먹을 수록 마음 한켠이 묵직해져 가긴 한다. 조금씩 쳐지는 어깨, 라고 하기엔 너무 뻔한 표현이지만, 그런 걸 보면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커지긴 한다. 더 잘하고 싶은데 그랬던 적이 없어서 어색하고, 머뭇거리지만 잘하려고 노력한다. 제멋대로 사는 버릇이 없어지진 않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니 알아줬음 좋겠다.


아빠는 곧 있으면 퇴직이다. 그러면 며칠 혹은 몇달 정도 내 의료 보험 밑에 아빠와 엄마가 들어올테다. 친구에게 가장된 느낌이라고 했더니 가장은 집주인이지, 라는 대꾸를 듣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됐으니 나름 의미가 깊다. 보호자 나. 평생 부모의 보호를 받다가 하나의 개체로 독립하는 길목에 섰다.


사실 이글을 쓰는 것보다 직접 가서 사랑한다, 고맙다 한마디가 더 크고 좋은 방법이란 것도 안다. 평생 엄마 옆에서 산다고 했지만,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지만, 그러지 못할 거란 것도 어느정도 예상한다. 아마 후회할 거다. 이 후회는 확신이다. 차근차근 더 잘해야 겠다.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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