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단이 엉망인 노년의 하루와 멀티비타민이 만났을 때
약국 카운터 앞에 서는 어르신들 중에는
항상 이 말을 붙이는 분들이 있다.
“밥은 잘 못 챙겨 먹으니까, 멀티비타민 하나는 먹어야지.”
한 손에는 혈압약 처방전,
다른 손에는 “종합비타민”이라고 적힌 상자를 들고 계신다.
저 말이 그냥 기분 탓인지, 실제로 의미가 있는 선택인지
나도 오래 궁금했다.
최근 미국 고혈압 저널에 실린 한 연구가
그 질문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흥미로운 답을 내놓았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약 14억 명이 고혈압과 함께 산다.
세계심장연맹은 고혈압을
“전 세계 사망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라고 부른다.
심근경색, 뇌졸중, 심부전, 만성 신장질환, 치매, 심지어 시력 상실까지
수많은 질환의 출발점이 되는 숫자, 혈압.
유전이나 인종처럼 바꿀 수 없는 요인도 있지만
식단, 운동, 금연, 체중, 스트레스 같은
우리가 손댈 수 있는 생활습관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영양 쪽에서는
칼륨, 마그네슘, 칼슘, 식이섬유가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들이 꽤 쌓여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과 유럽 성인의 3분의 1 이상은
“필요한 영양소는 그래도 채워야지”라는 마음으로
매일 멀티비타민을 삼킨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코스모스(COSMOS)라는
대규모 시험의 데이터를 다시 분석한 결과다.
연구진은 65세 이상 여성 약 8,900명과
60세 이상 남성을 모집했다.
코코아 추출물과 멀티비타민·멀티미네랄(MVM)이
고령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는 시험이었다.
예방의학 의사인 리쿠타 하마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고혈압은 여전히 고령층에서 아주 흔하고,
약을 처방해도 꾸준히 드시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비타민과 미네랄은 혈압 조절에 관여하는 역할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멀티비타민처럼 간단하고 접근성 높은 전략을 찾는 것은
예방 도구로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비타민 D, 비타민 E 같은
‘한 가지’ 영양소만 떼어 놓고 본 연구들은
결과가 들쭉날쭉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실제 사람들이 많이 먹는 방식,
여러 미량 영양소가 섞여 있는 종합비타민을 통째로 들여다본 것이다.
결과는 조금 미묘했다.
전체 참가자를 통틀어 보면
멀티비타민을 3년가량 매일 먹은 그룹과
먹지 않은 그룹 사이에
고혈압 발생률이나 혈압 수치의 뚜렷한 차이는 없었다.
“역시 별 소용이 없는 건가?” 싶을 때
연구진은 한 가지를 더 들여다봤다.
처음 연구에 들어올 때
식단의 질이 어떤지,
그리고 혈압이 아직 정상 범위였는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눠 본 것이다.
식단의 질은
대체 건강식 지수(AHEI)와
대체 지중해 식단 점수(aMED)라는 도구로 평가했다.
쉽게 말해,
채소·과일·통곡물·건강한 지방을 얼마나 먹고,
가공식품·단 음료·나트륨을 얼마나 줄이고 있는지를 보는 점수다.
여기서 “식단 질이 낮다”고 분류된,
그러니까 평소 밥을 통해 영양을 제대로 못 챙기고 있는 어르신들.
그 가운데 연구 시작 시 혈압은 아직 정상인 사람들에서
작지만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멀티비타민을 꾸준히 먹은 그룹에서
고혈압 발생 위험과 혈압 수치가
조금 더 낮게 유지된 것이다.
하마야 박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식단의 질이 낮은 사람들은
항산화제, 칼륨, 마그네슘처럼
혈압과 혈관 기능에 중요한 미량 영양소의
기본 수준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는 멀티비타민이
그 부족분을 메워 주는 안전망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식단의 질이 높은 사람들은
이미 음식으로 충분히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이득을 얻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효과가 “이미 고혈압인 사람”이 아니라
“아직 혈압이 정상인 사람들”에서 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혈관이 많이 상하기 전에,
만성 고혈압이 자리를 잡기 전에
조금 더 잘 지켜 주는 정도의 도움.
멀티비타민의 역할을 굳이 표현하자면
그 정도에 가까워 보인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중재적 심장 전문의 청한 천 박사는
이번 결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전반적으로는
일상적인 멀티비타민 섭취가
혈압 조절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식단 질이 낮은 일부 그룹에서는 예외가 있었고,
이것이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보여 줍니다.
어떤 식단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
멀티비타민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그 연결고리를 더 정밀하게 보는 게
다음 단계가 될 겁니다.”
약국에서 멀티비타민을 고르는 어르신들을 떠올려 본다.
아침 겸 점심으로
식빵 한 장, 커피 한 잔으로 버티고,
저녁에는 입맛이 없어 김치에 밥만 비벼 드시는 분들.
“나이 드니까 입맛도 없고,
씹기도 귀찮아서 대충 먹어요.”
이런 분들에게
식단 개선이 1순위라는 건 분명하다.
채소와 과일을 조금 더,
국물은 조금 덜,
짠맛은 천천히 낮춰 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늘 말처럼 잘 되지 않는다.
그럴 때
멀티비타민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핍이 너무 심해지지는 않게
바닥을 한 번 받쳐 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건 순서일 것이다.
첫째는 여전히 식단.
가능한 범위 안에서
진짜 음식으로 채우는 시도.
그 위에,
식단 질이 낮고,
고령이고,
혈압이 아직 크게 오르지 않은 분들에게
멀티비타민을 “하루 한 알 짜리 안전망”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할 때도
담당 의사나 약사와 함께
현재 먹는 약, 신장 기능,
다른 보충제와의 상호작용을 같이 점검하는 것이 좋다.
결국 이 연구가 말하는 건
“멀티비타민을 먹으면 고혈압이 예방된다”는
간단한 슬로건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의 질,
채워지지 않은 영양의 빈칸,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내 혈관을 지키기 위한 작은 선택들.
그 복잡한 퍼즐 사이에서
멀티비타민이 차지하는 조각의 크기가
아주 작지만,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애매하게 의미가 있다는 정도.
오늘도 약국 카운터에서
혈압약 봉투와 멀티비타민 상자를 함께 들고 가는 어르신을 보면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선생님, 이 알약도 좋지만
오늘 저녁에 드실 거,
여기에 들어 있는 칼륨과 마그네슘을
조금이라도 식탁에서 같이 찾아보면 어떨까요?”
알약 한 알과 식탁 위 한 접시 사이에서
우리의 혈압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다른 길을 선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