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건강, 소화, 수면… 사람들이 영양제로 메우려는 것들
약국에서 일하다 보면,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분들이 있다.
멀티비타민, 칼슘, 유산균, 오메가3...
상자 앞에서 이름을 읽었다 다시 놓고, 또 다른 상자를 집어 드는 손.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냥… 몸에 하나쯤은 챙겨야 할 것 같아서요.”
이 말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호주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최근에 읽은 호주의 건강기능식품 보고서를 보면서
나는 우리 약국 진열대를,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얼굴들을 자꾸 떠올렸다.
호주에서 가장 잘 팔리는 건강기능식품 카테고리 1위는 여성 건강이었다.
여성용 종합비타민, 갱년기 보조제, 뼈 건강 제품 같은 것들이 이 묶음 안에 들어간다.
올해 이 시장 규모만 3억 7,500만 호주달러.
그중 여성용 멀티비타민만 따로 떼어 봐도
소매 가치가 약 9,740만 호주달러,
전체 종합비타민 시장의 거의 4분의 1을 혼자 차지했다.
유로모니터 조사에 따르면
40~60세 여성의 3분의 1 이상, 37%가
갱년기나 뼈 건강 보충제를 이미 쓰고 있다고 답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여성 5명 중 4명(78%)이 보충제를 사용 중이었고,
남성은 69%였다.
호주에서도 ‘영양제 고객의 다수는 여자’라는 법칙은 그대로였다.
카테고리 순위를 조금 더 내려가 보면
2위는 소화 건강(2억 6,400만 AUD),
3위는 관절 건강(1억 8,400만 AUD),
4위는 면역(1억 5,800만 AUD),
5위는 뼈 건강(1억 3,600만 AUD)이었다.
프로바이오틱스와 장내 미생물(microbiome) 제품이
이제는 “집집마다 하나쯤 있는 필수품”이 되면서,
소화 건강 시장은 2016년 이후 두 배 이상 커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호주인의 42%는
“더 나은 소화 건강 옵션을 찾고 있다”고 답했다.
이미 유산균을 먹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호주인의 74%는 지난 1년 동안 영양제를 먹었다.
그중 41%는 매일 복용 중이었다.
가장 흔하게 쓰는 건
종합비타민(43%), 비타민 D(35%), 비타민 C(33%),
그다음이 프로바이오틱스(28%), 오메가3/어유(26%)였다.
절반이 넘는 58%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영양제를 먹고 있다고 말했고,
24%는 이미 진단받은 질환을 관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10명 중 7명(71%)은
“보충제는 기존 약물 치료를 보완해서
치료 결과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쓰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약과 캡슐에 ‘건강’의 일부를 맡기고 있는 걸까.
보고서의 다음 페이지에는
조금 다른 숫자들이 등장한다.
호주인의 36%만이
“현재 의료 시스템이 만성질환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답했고,
62%는 “치료에만 집중하고 예방에는 소홀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수면 문제에 대한 치료 만족도는 28%,
갱년기는 27%,
관절·근골격 같은 이동성 문제는 28%,
소화 건강은 35%.
대부분 “절반도 안 되는 만족”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자 나타난 현상이 있다.
그 불만족이 그대로
영양제 사용 증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갱년기, 수면, 소화 건강 같은 분야는
의료 시스템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만큼
관련 보충제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기분과 이완(mood & relaxation)을 돕는 보충제는
2020년에서 2025년 사이
연평균 성장률 21.3%라는 속도로 치고 올라갔다.
스트레스와 불안은
호주인의 31%가 꼽은 ‘3대 건강 우선순위’ 중 하나였고,
10명 중 3명(29%)은
이를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볼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잠은 또 어떨까.
보고서는 수면 부족이
스크린과 조명에 의해 악화되고,
매년 663억 달러의 경제적 비용을 낳는다고 적어 놓았다.
수면 관련 치료 만족도는 겨우 28%.
당연히 수면 보조제, 멜라토닌, 허브 제품을 찾는 손길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숫자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런 문장으로 모인다.
의료 시스템이 채워 주지 못하는 공백을
사람들은 영양제와 보충제로 메우고 있다는 것.
갱년기 상담이 짧게 끝날수록,
수면과 소화에 대한 별다른 대안이 없을수록,
약국과 온라인몰의 보충제 코너는 더 붐빈다.
호주의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약국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내게는
그리 먼 나라의 숫자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병원 가도 딱히 해주는 게 없어서요.”
“약은 먹고 있는데,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 말들은 종종
칼슘, 유산균, 오메가3 상자 위에
살짝 얹혀 나온다.
아마 호주에서도,
어느 수퍼마켓 진열대 앞,
어느 약국 계산대 옆에서
비슷한 말들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이 숫자들을 보면서
나는 영양제를 “좋다/나쁘다”로 나누기보다는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이건 단지
비타민 D를 얼마나 먹었느냐,
오메가3가 몇 mg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내 몸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마음과
의료 시스템이 그 마음을 얼마나 받아주고 있는지 사이의 거리,
그 간격을 보여주는 지표 같기도 해서다.
그 간격이 넓을수록
진열대 위 상자는 더 늘어나고,
보충제 카테고리 이름은
더 세분화되고, 더 정교해진다.
여성 건강, 소화, 관절, 수면, 기분…
우리가 잘 돌보지 못한 삶의 구석들이
새로운 라벨을 달고 병 속에 담기는 것처럼.
그래서 오늘 약국 진열대를 정리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게 된다.
“이 상자들 뒤에,
사실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갱년기로 잠을 설치는 50대 여성,
새벽 두 시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있다가
출근길에 눈밑이 퀭해진 30대,
만성 통증과 소화불량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유산균을 집어 드는 60대.
우리가 진짜 바꾸고 싶은 건
아마 그들의 하루일 것이다.
영양제는 그 하루 사이를 잇는
작은 다리 중 하나일 뿐.
그 다리가 너무 얇지 않도록,
그리고 언젠가는
그 다리 말고도 여러 길을 함께 놓을 수 있도록,
숫자와 진열대 뒤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조금 더 오래 떠올려 보는 것.
어쩌면 그게
이런 업계 보고서를 읽고
약국으로 돌아온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