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단어장 앞에서 안심하던 밤

다국어보다 삶의 조건이 뇌 노화를 더 잘 설명할 수도 있다

by 전의혁

나이가 들수록, 뭐라도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다.


퇴근길 지하철 창에 내 얼굴이 비치고, 휴대폰 속 외국어 앱이 오늘의 단어를 띄운다.
이어폰 너머로 낯선 발음이 흘러나오면, 나는 괜히 마음이 조금 놓이곤 했다.
이렇게라도 하면 내 뇌도 조금 덜 늙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던 밤이 있었다.


그건 유난이 아니라, 불안을 내 손안에 두고 싶어지는 마음에 가깝다.


나도 그랬고, 특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날엔 더 그랬다.
단어 하나를 외우는 일이 취미가 아니라 보험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혹시 당신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비슷한 위안을 가져본 적이 있나.


20260317 _ 외국어 공부가 뇌 노화를 막는다고 _ 2.png


실제로 지난해 《네이처 노화》에 실린 한 연구는 그 마음을 흔들 만큼 솔깃했다.
유럽 27개국의 기록을 검토한 뒤,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뇌 노화의 위험을 54% 낮춘다고 봤다.
반대로 하나의 언어만 쓰는 쪽은 뇌 노화 위험이 더 높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 연구자도 있었다.


휴스턴대학교 심리학 교수 아르투로 에르난데스는 이 연구에 결함이 있다고 봤다.
그는 ‘이중언어의 신경학적 기반 연구실’ 책임자이기도 하다.
에르난데스는 뇌 건강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은 다국어 사용이 아니라 한 국가의 부와 삶의 조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최근 《뇌와 언어》에 실린 연구에 담겼다.


20260317 _ 외국어 공부가 뇌 노화를 막는다고 _ 2-1.png


그가 다시 본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를 둘러싼 삶의 조건이었다.


유럽에서 다국어 사용률이 높은 나라들은 대체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기도 했다.
의료 수준이 높고, 기대수명이 길고, 살아가는 조건 자체가 더 안정된 곳들이었다.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는 다국어 사용률이 높으면서 기대수명이 82.5세에 이르렀다.


반면 다국어 사용률이 낮은 불가리아는 75.8세, 루마니아는 76.3세였다.
에르난데스는 이 6~7년의 기대수명 차이를 언어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보다는 세계적 수준의 의료, 더 나은 영유아기 영양, 더 높은 직업 안전성, 더 낮은 만성 스트레스 같은 요인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는 것이다.


20260317 _ 외국어 공부가 뇌 노화를 막는다고 _ 2-2.png


일본 사례도 같은 질문을 남겼다.


대체로 단일언어 국가인 일본의 기대수명은 84.5세다.
에르난데스는 낮은 불평등, 건강한 식단, 견고한 보편적 의료 시스템이 그 이점을 언어보다 더 잘 설명한다고 봤다.
적어도 오래 사는 이유를 언어 하나로만 설명하긴 어렵다는 뜻에 더 가까웠다.


이 말은 조금 서늘했지만, 이상하게도 더 정직하게 들렸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고, 세계를 넓히고, 익숙한 삶 밖으로 한 걸음 내딛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노화를 위한 확실한 도움처럼 과장해 약속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20260317 _ 외국어 공부가 뇌 노화를 막는다고 _ 2-3.png


나를 지키는 힘이 늘 내 의지와 습관만으로 생기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단어장을 덮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새 언어를 배우는 기쁨은 그대로 품되, 건강한 노화를 너무 개인의 요령으로만 밀어 넣지는 말아야겠다고.


그의 말은 오래 남았다.

개인이 해볼 수 있는 노력과, 사회가 받쳐줘야 하는 조건을 서로 바꿔 말하기 시작할 때, 과학은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저녁 식탁 앞, 마음이 먼저 지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