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대신 ‘헤드셋’을 드릴 수도 있는 날이 올까

집에서 쓰는 우울증 치료 기기를 처음 승인했다는 소식을 읽으며 든 생각

by 전의혁

약국 카운터 앞에 서면, 비슷한 질문을 자주 듣는다.


“선생님, 약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하루 두 알 항우울제를 받아 가는 30대 직장인,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수면제를 고민하는 50대 손님,
아이 앞에서는 웃지만 계산대에 처방전을 올려놓을 때만큼은
표정이 살짝 내려앉는 엄마들.


그럴 때마다 나는 말끝을 고른다.
“약이 다는 아니지만, 지금은 약이 꼭 필요할 수 있어요.”
“상담치료나 운동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기사를 읽었다.


“FDA, 우울증 치료 가정용 헤드셋 기기 첫 승인.”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집에서 쓸 수 있는 우울증 치료 기기를 처음으로 승인했다.
이름은 Flow FL-100.
두개골 전기치료 자극기, 영어로는 cranial electrotherapy stimulator.


이 기기는 경두개 직류자극술,
tDCS(transcranial direct current stimulation)라는 방식을 쓴다.
두피 위에 전극을 붙이고, 아주 약한 직류 전류를 흘려
우울증과 관련된 뇌 회로의 활동을 살짝 조정하는 장치다.


중등도에서 중증의 우울증 장애를 가진 성인에서
단독으로, 혹은 약물치료에 더해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됐다.
‘병원에서만 쓰는 기계’가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 가능한 형태로 허가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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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기를 만든 플로우 뉴로사이언스(Flow Neuroscience)라는 회사는
“우울증은 뇌의 작동 방식을 물리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치료 역시 뇌 기능을 직접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약을 삼키는 대신,
뇌에 직접 손을 내미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당연히 FDA도 말만 듣고 허가해 준 건 아니다.
근거가 된 건 Empower라는 이름의 연구,
등록번호 NCT05202119.


미국과 영국 두 곳에서 진행된
완전 원격, 이중맹검, 위약 대조, 무작위 배정 시험이다.
말이 길지만, 핵심은 이렇다.


누가 진짜 치료를 받고, 누가 가짜 치료(위약)를 받는지
환자도, 연구진도 모른 상태에서
주사도 약도 아닌 ‘헤드셋 치료’를 집에서 꾸준히 해 본 것이다.


주요 우울장애 환자 174명이 참여했다.
10주 동안, 처음 3주는 주 5회,
그다음 7주는 주 3회,
각 세션은 30분씩.


해밀턴 우울증 평가척도라는,
정신과에서 오래 쓰여 온 평가 도구로
우울감이 얼마나 줄었는지 살폈다.


결과를 숫자로 보면 이렇다.


진짜 전기자극을 받은 치료군은
점수가 9.41±6.25점 떨어졌다.
가짜 치료군은 7.14±6.10점 개선됐다.


둘의 차이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95% 신뢰구간은 0.51~4.01, P값은 0.012.


“극적인 기적”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위약 효과까지 감안해도
실제 tDCS 치료가 분명한 추가 이득을 준다는 뜻이다.


Flow FL-100은 사실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는 아니다.
2019년, 스웨덴에서 처음 승인된 뒤
유럽의약품청, 노르웨이, 스위스, 홍콩에서도 허가를 받았다.


유럽에서는 현재 495유로,
일반의약품처럼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FDA는 이 기기를 처방전이 필요한 의료기기로 분류했다.
누구나 그냥 온라인에서 사는 기기가 아니라,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거쳐야 하는 도구라는 의미다.


흥미로운 건 약사의 역할이다.


유럽에서 Flow사는 약국과의 파트너십을
소매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약국은 약만 나가는 곳이 아니다.
환자에게 기기를 어떻게 착용해야 하는지,
언제, 얼마나 자주 써야 하는지,
다른 약과 함께 써도 되는지,
어떤 느낌이 들면 사용을 중단하고 병원에 연락해야 하는지 등
‘사용 설명서’를 사람의 언어로 풀어주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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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시험에서 나타난 이상반응은
대부분 경미한 피부 증상이었다.
발적, 자극감, 가려움, 따끔거림, 가벼운 화상.


약사라면 이런 가능성을 미리 설명해 줄 수 있다.
“조금 따끔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붉어지면 바로 사용을 중단하고 병원과 상의하세요.”


설명 한 줄이
누군가의 치료 지속 여부를 좌우할 수도 있다.


숫자를 더 들여다보면,
이 기기가 겨냥하고 있는 현실이 보인다.


미국 보건복지부가 2013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을 앓는 미국 성인은 약 1,600만 명.


더 최근 연구에서는
성인과 청소년을 합친 우울증 유병률이 13.1%였고,
그 가운데 87.9%가
우울증 증상이 집, 직장,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거의 열 명 중 아홉 명이
삶의 여러 영역이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식을 읽으며
약국 카운터 앞 풍경을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는 항우울제와 함께
“집에서 쓰시는 전기 자극 기기 사용법 안내해 드릴게요”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약을,
약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뇌를 직접 건드리는 새로운 도구까지 더해 줄 수 있는 시대.


물론, 이 한 기기가 모든 우울증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집과 일터와 관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숨이 트이게 해 줄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가 있다.


오늘도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한 번쯤 이렇게 묻고 싶다.


“약만 드릴까요,
아니면 뇌를 직접 도와주는 다른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볼까요?”


우울증 치료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약사라는 직업이 서 있다는 게,
조금은 벅차게 느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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