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린 걸음으로 -
잠들지 못한 어느 날 밤이었다. 무언가 줄줄줄~~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작은 탁상시계에서 초침이 쉼 없이 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는 소리였다. 그 시계는 원래 잠이 많은 나를 깨우기 위해서 알람을 맞춰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에 울리도록 들여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시계의 용도가 역전되어 오히려 초침 움직임 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참, 아이러니(irony) 한 일이다.
나의 일상은 시계가 끌어가고 있다.
7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16년을 학생으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그 해, 3월에는 학생에서 교사로 위치가 바뀌어 지금까지 36년간을 근무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도 나는 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근무학교 관사에서 살았기에, 결국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평생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학교는 어떤 곳인가?
철저하게 시계가 지배되는 곳이다.
학교는 학교의 시계가 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조례 ~ 1교시 ~ 2교시 ~ 3교시 ~ 4교시가 끝나고 점심 식사 시간이다. 오후에는 5교시 ~ 6교시 ~ 간혹 (7교시) ~ 종례... 학교의 일과는 시계의 움직임으로 진행된다.
방송실에서 흘러나오는 차임벨은 시작종을 알리고, 끝종을 알린다.
만약 정전이 되어 차임벨이 울리지 않으면 학교에서는 대혼란에 빠진다. 언제 시작해야 하는지, 언제 끝나야 하는지 지표가 되는 알림이 없어지는 꼴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차대한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치러지는 날에는 정전에 대비한 설비까지 반드시 갖춰야 한다.
나는 학교 안에서만 살아왔고, 그 말은 결국 시계에 의해 지배되는 일상을 살아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어디를 가나 시간을 체크한다. 지금이 몇 시인지 체크하면, 곧바로 몇 교시 수업인지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존재 sein는 관심 interesse이다! '검색 결과'보다 더 명확한 '존재 검증'은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책(김정운 교수님의 창조적 시선)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깊이 공감이 되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검색했는지가 그 사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는 문장이다. 구글에서 어떤 단어를 검색하였는지, 관심이 곧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적시(摘示)되어 있었다. 관심이 곧 존재라는 전제에서 바라볼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하는 영역은 바로 'time'이란다.
미국 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오늘날 인간의 현대 문명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계'라고 단언한다. 산업혁명의 증기기관보다 시계가 더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면 음식을 섭취하면서 '비만'이 생겨났고, 시계가 밤 11시를 넘기면 졸리지 않아도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인해서 '불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모두 시계가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기 시작했을까? 그 답은 기차 때문이라고 한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시계가 필수적이었다는 말이다.
비행기나 기차와 같이 탑승 타임을 놓쳐서 엄청난 후폭풍을 겪지 않으려면 시계는 너무나 소중한 지침이다. 특히 패키지여행에서 시계는 정말 정말 중요하다.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모두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패키지여행은 그런 점에서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정한 의미의 일상 탈출을 할 수 없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방학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난다. 일정을 잡아두었는데, 갑자기 남쪽 지역에 대설경보가 내려졌다. 차를 가져가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다 결국 운전을 하고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전라북도 정읍 쪽으로 들어서니 세찬 눈보라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전라도 쪽으로 눈이 많이 내려서 겨울에는 거의 눈이 오지 않는 경상남도 남해로 부모님을 모시고 떠났다. 따뜻한 남쪽을 향해 며칠 동안은 쉬고 올 셈이었다.
남해는 눈이 전혀 없었다. 여행지를 잘 택했다 싶은 지점이다.
사천의 해상 케이블카, 남해의 독일마을, 조도의 몽돌 해변, 삼천포 포구, 진주성 등지를 주로 차로 움직이면서 올해의 겨울여행을 하였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학교의 시간을 잠시 벗어나 조용히 흘러갔다
방학이 되어 또 하나 시간을 벗어나는 일이 '책 읽기'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님의 '창조적 시선'을 아주 오래도록, 깊이 있게 붙잡고 있다. 시간을 벗어나는 책을 읽는 시간이다.
시간을 벗어나는 행위는 그 속에 빠져있는 시간이다빠져드는 시간이 있는 겨울방학이다. 여행지에서,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에는 잠시 나를 움직이는 학교의 시간을 잊는다. 나의 일탈이다. 너무 익숙해서 지루했던 일상의 시간을 벗어나, 다른 시간을 살아보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지쳐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눈으로 세상과 사람과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늘 흐르던 시간을 잠시 벗어나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낯선 시간에 나를 들여다 놓아야겠다. 내가 있는 이곳을 잠시 여행을 온 것처럼 새롭게 바라보고, 늘 걸어 다니던 길을 오늘은 잠시 다른 길로 걸어가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봤다. 냉동실에 있는 떡갈비를 꺼내서 구운 후, 햄버거 빵 사이에 야채와 함께 끼워서 햄버거를 만들었다. 스스로 만족했다. 늘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해낸 것에 스스로를 칭찬도 해줬다. 매일 듣던 피아노 연주 음악에서 때로는 다른 음악도 들어보고, 우연히 들어가 본 음식점에서 새로운 음식도 먹어봐야겠다.
나를 움직이는 시계를 벗어나 보는 것은 새로운 나를 만나고, 더 나은 날이 되지 않을까?
다시 돌아갈 나의 일상의 시계이지만, 오늘은 잠시 지금까지의 시간을 벗어나있다.
그래서 오늘 날씨는 흐리지만, 마음은 새로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