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토 Nov 03. 2022

나이 40. 다시 학교로.

대기업 프로 용병기


자기소개서.



빽빽하게 작성된 4장짜리 자기소개서를 프린터기로 인쇄하고 종이로 출력된 내용을 다시 읽어보니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내가 글을 이렇게 잘 썼나 싶기도 하고 17년차 직장인으로 살아왔는데 그래 이정도 할말은 있어야지 싶은 마음에 뿌듯하기도 합니다.



특별하게도 이번 자기소개서는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위한 서류가 아닙니다.

그동안 고민만 해오던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했거든요.



오늘 저는 필요한 원서를 드디어 모두 준비했습니다. 제출서류는 주로 다양한 증명서 들이라 일일이 출력하기가 조금 귀찮긴 해도 신경 쓸 것은 딱히 없었습니다.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부분은 바로 자기소개서 입니다.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물이니 만큼 개개인 별로 많은 차이가 있어 당락을 좌우할 내용 같기도 하고, 일단 내용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고민을 안 할 수 없으니까요. 이거 하겠다고 주말에도 노트북을 켜고 초안을 잡고, 점심 시간에도 혼자 샌드위치 점심을 하며 초고를 다듬고 했었습니다. 그 결과물을 오늘 출력하고 마주했으니 얼마나 흐뭇한지. 그동안 일을 하며 많은 보고서와 리포트를 만들었지만, 나에 대한 리포트를 만들어 낸 기분이 들어 그 어느 리포트를 마무리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장 좋았던 포인트는 프로의 길을 오래 걸어온 노병이라 그런가 쓸 내용이 너무나도 많아서 내용을  빼는데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자기소개서 양식에는 한 장으로 되어있는데 지원동기, 전공 선택 배경, 경력 정도의 내용으로 간략히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내용을 써내려 가다보니 일단 지원 동기만 두장이 넘었습니다. 보고서 쓰면서 뭐 넣을지 몰라 고민하는 것보다 뭘 뺄까 고민 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자기소개서를 쓰면서는 콘텐츠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이직을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수없이 써봤지만, 저는 솔직히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한 장을 넘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점은 지원 동기, 이직 사유 등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도 잡지 못했습니다. 지원하는 회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가는 거고, 돈 받으러 가는 거지 그걸 얼마나 자세하게 써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이직사유 또한 마찬가지로 이전 회사에서 더 이상 일하기 싫고, 새로운 회사에서는 좀 해볼 마음이 있으니 이직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차차리 뭐 잘리기라도  했는지, 사고를 쳤는지, 아니면 자율의지로 이직인 건지 등등을 물어봤으면 쓸 말이 많았을 텐데. 전 이런 사유로 항상 이력서 중심으로 내용을 작성하고 자기소개서는 10줄 이내, 가끔은 이직사유 2줄 정도로 간단하게 자료를 작성하곤 했습니다. 그런 상태로도 다행히 이렇게 몇 번의 이직을 성공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학원에 제출할 자기소개서는 무려 4페이지 입니다. 그만큼 뭔가 제 스스로 정말 대학원에 가고 싶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비는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잘한 결정이네 싶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이전까지 직장인으로서 일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병행할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공채로 들어간 회사에서 평생 직장을 생각하며 충성맹세를 할 때는 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굳이 뭘 또 학교까지 가서 배워야 하나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몰라서 배워야 하는 건 인강으로 하면 그만이고 그 학비면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를 하겠다는 강한 투자자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공부는 더 안 하고 싶어 회사 들어와서 일하며 돈 버는데 굳이 일하면서 대학원에 가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좀 게으른 편이라 퇴근해서 저녁 먹고 운동하기도 버거운데 저녁에 학문이라니 전혀 희망하지 않는 스케줄 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 용병으로 일하니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당장 1-2년 뒤에 다른 어디론가 갈 수 있으려면 지금 그냥 주어진 일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졌습니다. 실무는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스피드도 떨어지는 노병이 마음도 젊은 용병들과 경쟁하고 남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경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중한 실력을 가진 프로분들과 하루라도 더 함께하려면 나도 좀 더 잘하는 게 있어야 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 개인으로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며 축적한 최대한의 경험에 내 분야의 지식을 더해 넓은 시야를 갖고 인사이트를 낸다면 조금 더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회사든 다른 곳에서든 저는 조금 더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2년간 좀 고생스럽겠지만 대학원은 용병의 생명력을 충분히 연장할 수 있는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조금은 한 살이라도 더 어렸을 때, 아예 주니어 때 먼저 도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안정적인 평생 직장러의 마음가짐 이었어서 인지 솔직히 전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실무를 겪을 만큼 겪은 노병으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의지가 충만해진 것 만이라도 다행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꼭 대학원이 아니더라도

데이터나 테크 쪽에서 언어나 기술들을 매일 공부하며

일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노력하고 있는 분들

항상 진심으로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동료가 희망퇴직을 선택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