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형이 뒤집혀도, 당신은 정말 다를 수 있을까

<슬픔의 삼각형> (2022), 더럽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by 신현민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 영화는 그 불편한 진실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있노라면 불쾌함과 동시에 묘한 시원함이 따라온다. 불편하지만, 그만큼 솔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자신의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패션 브랜드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델들의 표정은, 계급과 이미지가 얼마나 손쉽게 인간의 태도를 규정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은유라기보다 선언에 가깝다.
이 영화가 다룰 세계가 얼마나 가공되지 않았는지를, 관객에게 미리 경고하는 신호처럼 보인다. 이후 이어지는 인물들의 대사와 상황 역시 같은 결을 유지한다.

야야와 칼의 관계는 사랑조차 협상과 계산의 언어로 환원되는 세계를 드러내고, 러시아 재벌 드미트리는 부를 말로 과시하며 권력을 확인한다. 선장은 자신의 신념을 확신에 찬 언어로 쏟아내지만, 그 역시 또 다른 특권의 얼굴일 뿐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좀처럼 침묵하지 않는다.
삼각형의 꼭짓점에 선 이들은 말하고, 과시하고, 비난한다. 반면 그 바닥에 놓인 사람들은 묵묵히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영화는 이 불균형을 중반부까지 집요하게,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인다.
그러나 그 과잉은 실수가 아니라 전략에 가깝다.

배가 흔들리며 삼각형이 뒤집히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위치가 바뀌는 순간, 권력의 얼굴도 함께 바뀐다. 헤비메탈 음악과 함께 쏟아지는 구토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다. 이전까지 말로 쏟아내던 오만함이 육체적으로 되돌아오는 형벌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직원들의 모습은, 권력이 인간의 태도를 얼마나 일방적으로 규정하는지를 더욱 또렷하게 대비시킨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끝내 토하지 않는다.

무인도에 이르러서도 영화의 방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역할뿐이다.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자, 인간의 태도 역시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중요한 점은 영화가 이 변화를 개인의 성격이나 도덕성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위치와 권력이 주어질 때, 누구나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가능성. 이 영화는 바로 그 ‘슬픈 삼각형’을 끝까지 응시한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감독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마지막 선택은 폭력인지, 생존인지, 혹은 또 다른 권력 유지의 본능인지 끝내 확정되지 않은 채 멈춘다. 그 유보된 침묵이야말로 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잔인한 질문이다.

이 모든 연출은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잔인할 정도로 친절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슬픔의 삼각형>의 미덕이다. 예민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서 반드시 정제되고 고상할 필요는 없다는 태도.

이 영화는 풍자와 비판을 선택하면서도 ‘있어 보이는’ 포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대신 더 솔직하고, 더 저급하고, 더 더럽게 관객 앞에 현실을 내놓는다. 그 방식 자체가, 영화가 비판하는 오만함과 정확히 닮아 있다.

<슬픔의 삼각형>은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편함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관객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삼각형의 어디인가.
그리고 정말, 당신은 다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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