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의 비행 동안 많은 생각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함께 한 남편도 말이 없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겠지? 영국 가정을 보면서 배울 기회도 생길 거야.’
‘내 편이 생겼어. 나를 보호해 줄 것이고, 나를 이끌어 주기도 하겠지. 술·담배도 하지 않고. 같은 가치관을 가졌으니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창 밖을 보며 나는 혼자 묻고 답하고 있었다.
오후 5시에 도착한 영국은 벌써 해가 지고 암흑같이 어두웠다.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교단체 사람들과 함께 영국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같이 영국으로 온 사람들끼리 세 가지 약속했다. 영국 생활에 빨리 적응하고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첫째, 같이 밥 먹지 않기. 둘째, 한국말로 대화하지 않기. 셋째, 한국 음식 만들어 먹지 않기. 예상대로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서로 의지할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 팀원 중 나이 지긋한 부부는 싱글들을 매주 집으로 불러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이런저런 이야기 자리도 마련해 주셨다. 남편은 신학 공부에 몰입하려는 생각뿐이어서 원래 약속을 깨려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 외 다른 사람들은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주로 나에게 했다. 나와 교육을 같이 받은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남편과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호소를 들어야 했고, 그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서서히 한국 사람들로부터 멀어졌고. 나는 그동안 진심으로 마음을 나눈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남편과 좋은 가정을 일구어 보려는 꿈이 있었기에 남편의 말을 따랐다. 점점 남편 말고는 말할 사람이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 첫 아이가 생겼다. 임신 기간 내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었다. 전라도 손맛을 가진 엄마 음식은 맛깔스러웠다.
“고등어 김치찜, 오징어채, 김치찌개, 불고기.”
침대에 누워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며 설레다 잠이 들곤 했다. 남편이 막 신학 공부를 시작하는 때여서 군것질할 돈도 없었다. 임신기간 동안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남편은 묻지 않았다. 임신기간 동안 맛난 것을 먹으면서 사랑받는 사람도 있다던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우리가 우리 상황에서 온갖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잘 견뎌 보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했다. 못 해줘서 속상해할 수도 있을 남편 자존심을 지켜주는 게 음식보다 중요하니까.
입덧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어느 날, 남편과 처음으로 소리를 높여 다투었다. 처음 보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시내를 걸어 돌아다녔다. 갈 곳도 없었다. 영국은 5시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기에 그냥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해서였을까? 집으로 들어서니 남편이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