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언젠가의 이야기

by 집없는 거북이

이 영화를 볼 때 감독에 대한 스캔들을 차치하고 보려했다. 이 영화의 제목부터 시기까지 외적으로 재미있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들을 모르는 내가 섣불리 그들을 내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영화를 재미있게 보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게 부담된다. 이전까지는 영화를 찌질하고 무모한 남자들을 욕하면서, 도도하지만 멍청한 여자들을 욕하는 재미로 봤다. “저게 뭐야, 말도 안돼”라는 가벼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영화들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이제 이 영화는 수심가득하다. 그 무거움에 나는 휩쓸려서 이전처럼 깔깔거리지 못 하고 나도 어느 순간 심각한 마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마치 농담으로 가볍게 시작한 술자리가 점점 진심이 나오면서 무거워지듯 변해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점점 변해간다.
홍상수 감독의 일명 ‘찌질한 남자’는 이 영화에서 ‘지긋한 중년의 남성’이 되어 있었고 이전의 무모했던 모습 대신 조심스러움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 그는 함부로 자신과 남을 믿지 못하고 탓하지 않는다. 이전의 그 남자는 무언가를 자의적으로 보고 믿었다. 무언가를 자의적으로 믿으면서 그 남자는 세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믿음에 의심을 던지면 그는 싸우면서 그 믿음을 지켜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함부로 믿지 못한다. 자신의 자의적 판단과 믿음으로 인해 전과될 책임이 자신 혹은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 생각한건지, 이제 그는 믿음에 대해 조심스럽고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치기 급급하다. 과거의 남자는 편한대로 생각을 하고자했다면, 이제 그 남자는 생각을 편안하게 하고자한다.
이전의 홍상수 감독의 작품 속 대사는 편안했다. 그 대사에 무게가 없었고 그 자체로 느껴졌다. 인물은 그 상황에서 그 대사를 했어야 했고, 메타포가 해석될 여지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그 후’에서의 메타포는 강렬하다. ‘그 후’라는 제목과 엔딩 속 소세키의 ‘그 후’는 그 메타포를 공유한다. 또한 대사 하나하나가 메타포 가득한 주문같다. 인물들의 대사들이 그 상황과 다소 이질적이고 거리감을 보이면서 마치 이 대사가 등장 인물이 아닌 누군가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종의 주문처럼 다가온다. 작품의 무게감이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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