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다

by 집없는 거북이


두 편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작년에 개봉한 풀잎들과 다른 건 오래전에 개봉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다. 풀잎들을 보고 나니 갑자기 이전에 못 봤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생각나 찾아보게 되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볼수록 모르겠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가 만든 세상 속에 전형적인 남자와 여자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영원한 회귀라고 느껴진다. 조금씩의 디테일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선형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원한 회귀는 단순히 한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홍상수 감독의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 그런 홍상수 감독의 영원한 회귀 속에서 나는 놀라울 정도로 공감하고 웃었다. 때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종종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내가 쉽게 내뱉는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부정하고 숨겨두고 싶은 치부까지도 그 영화 속에서 발견했다.
언제나 충격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통해 내가 부정하고 숨기고 싶은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이다. 나에게는 하나의 금기로 존재하는 모습들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홍상수 감독은 신기할 정도로 그 치부의 본질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통해 다음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이렇다. 최소한 영화에서만이라도 솔직해지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볼때 느낀 이런 감정은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하다. 다만 하루키의 작품은 메타포란 이름의 우리의 치부를 덮고 있는 막을 걷어내는 과정 속에서 성장해가지만 홍상수 감독은 그 치부를 과감하게 열어놓고 시작한다. 그리고 성장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하루키의 작품보다 휘발적이다. 하지만 보다 강렬하다.
근 10년의 간극이 존재했고. 홍상수 감독에게도 10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최소한 영화에서만이라도 솔직해지자.”라는건 변하지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과거작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는 홍상수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을 주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풀어나갔다면 ‘풀잎들’에서는 한 명의 관찰자를 통해 다른 인물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감독이 말하고 싶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방식이 좀 더 좋다. 영화 속에 내가 빠져들 공간이 좀 더 존재한다. 순전히 주어지는 인물들 간의 대사와 행동에 나는 나를 대입하고 동시에 그들과 같이 웃거나 화내거나 증오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방식도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매력을 느낀다. 이런 연유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누군가는 홍상수 감독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로 인해 홍상수 감독이 싫다고 한다. 뭐 그럴 수 있다. 내가 타인의 취향을 재단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나 역시도 그를 싫어해야한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해야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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