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붉은 돼지'

돼지 세상

by 집없는 거북이

공교롭게 영화 두 편의 제목에는 돼지가 나온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붉은 돼지’가 그 주인공들이다. 제목에는 돼지가 나오지만 실제로 돼지가 나오는 건 ‘붉은 돼지’ 뿐이다. 하지만 ‘붉은 돼지’에는 진짜 돼지가 없다. 반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속에는 돼지만 나온다. 멀쩡히 자기의 삶을 살고 있는 돼지가 무슨 죄겠냐만은 돼지가 가진 탐욕과 어리석은 이미지에 기초하여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돼지와 같다. 자신은 깨끗하고 순수한 줄 알지만 끝도 없는 시궁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남 탓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욕한다. 이 돼지들이 어떻게 우물까지 갔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돼지들은 결국 우물에 빠졌다. 멀쩡한 사람이 빠져도 다시 올라오기에 깊은 그 우물에 돼지가 빠졌다. 그럼 돼지가 빠지면 어떻게 될까? 다시 올라오지 못하게 된다. 돼지는 왜 우물에 갔을까? 물을 마시러 간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우물에 갔을 것이다. 그리고 물을 마시려고 우물에 올랐다. 그리고 우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돼지인 거에 놀라 빠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얼굴은 볼 새도 없이 물을 더 마시려는 욕망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이 중에 뭐가 중요할까? 그냥 돼지는 우물에 빠졌고, 그 속에서 후회할 틈도 없이 죽어갈 뿐이다. 이런 불쌍하지도 않은 돼지들을 감독 홍상수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런 홍상수 감독의 시선은 너무도 차가워서 보는 내내 우물에 빠진 돼지들에게 연민과 불쌍함이라는 감정이 들지 않는다. 이런 잔인하고 차가운 시선의 홍상수 감독이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 특유의 구도와 잔인할 만큼 사실적인 정사신을 통해 '역시 홍상수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렇게 염세적이고 절망적인 돼지만도 못한 인간들에 비해 ‘붉은 돼지’의 돼지는 너무나 쿨하고 멋지다. 웬만한 인간보다 멋지다. 그에게는 인간이 잃어버린 낭만이 있다. 돼지가 말하는 대사 하나하나가 인간적이고 가벼운 농담인듯 하지만 뼈가 들어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회의감과 염세가 짙게 묻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돼지에게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묻어 있다. 인간 본연의 순수와 행복 그리고 인간 공동체가 가지는 긍정적인 면이 모두 들어있다. 그렇게 돼지 ‘포르코’이자 인간 ‘마르코’ 자체가 아이러니한 것처럼 그의 말과 행동마저도 아이러니하다. 돼지가 아무리 인간을 싫어한다고 해도 결국 돼지는 인간을 인간이기에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돼지의 아이러니한 간극만큼 이 작품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휴머니즘적일 것이다. 아무리 인간으로부터 실망하고 상처 받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과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그 자체로도 순수하다. 순수한 영상과 이에 잘 어울리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한 몫한 듯하다. 그리고 ‘붉은 돼지’는 처음으로 내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만나는듯한 순간을 선사해주었다. 한동안 잊었던 소중한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의도치 않게 ‘돼지’로 이어지는 인간 군상에 대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비교하게 되었다. 둘 다 제목에 ‘돼지’가 나오고 ‘인간’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있다. 하지만 굳이 둘의 차이점이라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더러운 돼지와 다를 것 없는 놈들!”이라고 말한다면 “붉은 돼지”는 “돼지라는 제3의 눈으로 본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 돼지로 이런 극과 극으로 나뉠 수 있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이전 14화홍상수 유니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