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논란적인 감독이라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홍상수 감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기사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새로 기사화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선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논란적인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높은 작품성으로 평론가와 많은 관객의 호평을 받는다. 그의 작품과 사생활이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있고 동시에 언급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의 작품과 홍상수 감독 개인의 삶을 쉽게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옥희의 영화’에서 영화GV 씬은 극 중 감독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그리고 이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홍상수 감독이 실제로 처할 법한 대사로 구성된다. 그 외에도 홍상수 감독 영화의 특징인 일상적인 대사와 모습은 실제 그의 삶이 많이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렇게 그의 작품과 사생활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보인다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홍상수 감독과 작품을 분리해서 보려고 한다. 영화라는 감독의 자아가 강하게 반영되는 작품, 게다가 홍상수 감독과 같이 그 자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을 감독과 분리해서 감상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부적절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작품들을 통해 하나의 유니버스를 살펴보고 싶다. 비록 그 유니버스를 만든 것은 감독이고 자연스럽게 그의 자아가 그 유니버스 안에 녹아들어 있겠지만 감독의 자아와 유니버스를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그의 작품 제목처럼 우리는 홍상수 감독을 ‘잘 알지도 못 하면서’ 그를 작품으로 감상하고 사생활을 언론을 통해 접한다. 마치 우리가 사는 삶이 어떠한 의도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지 잘 알지 못 하지만 철학, 종교, 예술과 같은 다양한 인위적인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유니버스와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삶의 의도를 알지 못하니 그 자체로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홍상수 유니버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남자와 여자이다. 이들을 그저 남자와 여자로 칭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대부분의 영화를 관통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개별 영화와 개별 인물 별로 그들의 특징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그들이 공유하는 인물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홍상수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은 기본적인 한 남자와 여자의 수많은 페르소나들로 여겨질 수 있다. 마치 성경 속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가 수많은 인간 존재를 대표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홍상수 유니버스의 남자와 여자는 긴장 속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물론 영화를 보는 개인 별로 평가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어리석지만 용감한 남자’와 ‘영리하지만 나이브한 여자’로 인식한다. 어쩌면 정반대의 특성을 내재한 남자와 여자는 그 다름으로 인해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 다르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으며 때로는 다름을 넘어 대척점에 서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반대되는 특성으로 인해 대칭 관계를 형성한다. 즉, 다름과 같음이 공존하는 상당히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홍상수 유니버스에서 남녀관계를 쉽게 일반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 특정 상황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지만 설명의 용이함을 위해 일반화해본다.
‘어리석지만 용감한 남자’는 ‘속물’로 다시 환원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속이곤 한다. 그렇기에 종종 그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는다. 비록 어리석게 행동하고 말하지만 용감하게 꿋꿋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에 ‘속물’인 남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지만 용감함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리석은 행동과 용감함에 반감을 얻는 주변인들에 의해 행복이 아닌 파멸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자신의 행위에 후회하지만 이미 늦어 되돌릴 수 없게 되고, 잘못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근작인 후기작 들은 객관적인 시선의 연출로 인해 행복과 파멸이란 결과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그 판단을 돌림으로써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이 스스로를 대입해봄으로써 그 결과와 가치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영리하지만 나이브한 여자’는 ‘어리석고 용감한 남자’가 ‘속물’로 환원될 수 있듯이 ‘이상’으로 환원된다. 이상적인 이 여자는 남자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조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우월하다. 남자는 여자에게 구애를 하는 존재로 홍상수 유니버스는 남녀를 구조화한다. 따라서 구애를 하는 남자보다 받는 여자는 선택권을 갖게 되고 이 선택권은 남자와 여자의 비대칭적 구도를 형성한다. 또한 여자 역시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인지한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그녀는 영리하게 행동한다. 본인에게 구애하는 수많은 남성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비대칭적 구조는 영리한 여자의 나이브함에 의해 상쇄된다. 그녀는 이상적인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따라서 타인이 자신을 속이는 것을 싫어하고 본인 스스로 솔직하게 행동한다. 여성은 자신의 이상적인 인간관으로 인해 남자를 판단할 때 나이브함이 작동된다. 앞서 살펴봤듯이 남자은 ‘속물’이다. 따라서 여자를 속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이러한 남자에 넘어간다. 심지어 남자는 용감하기에 여자의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해낸다. 장애물을 극복한 남자가 등장하게 되면 여자는 그 남자를 자신의 이상적인 존재로 의미 부여한다. 이상적인 존재로 의미 부여하는 것은 결코 그 사람이 이상적인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비록 남자가 속물이고 실제 여성의 이상과 거리가 먼 존재일지라도 이상적인 삶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이상을 구성하는 한 존재로서 그 남자 역시 이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이상 속에 남자가 편입되면서 기존에 남자의 일방적인 구애로 인한 남녀 간의 비대칭이 대칭으로 재구성된다.이상을 지향하는 여성은 자신의 삶이 이상과 멀어지게 되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 원인이 되는 속물인 남자를 쉽게 축출해 낼 수 없다. 이전의 비대칭적인 구성이 아닌 새롭게 정렬된 대칭적인 구성은 여자가 주도권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홍상수 유니버스 속의 남자와 여자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관통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기 작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명확하게 남자와 여자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결과에 대한 부분을 관객의 몫으로 남김으로써 명확성이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판단하는 인물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 부분을 배제하고 그 인물 자체를 살펴보면 아직 남자와 여자의 내재된 특징은 유효하다. 이러한 반복적인 남자와 여자로 인해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자기 복제가 아니냐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뒤에서 설명한 니체의 ‘영원한 회귀’ 사상과 맞물려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이에 대한 의견은 우리의 실제 삶도 들여다보면 인간 존재는 다양하고 고유한 특징들을 지녔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특징은 내가 없는 곳에서 발휘될 수 있다. 홍상수 유니버스는 이러한 복잡한 실제의 삶을 좀 더 단순화시켜 남자와 여자라는 인물을 만들고 그들에게 홍상 수 감독이 만든 특징을 부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홍상수 유니버스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 속에서 연출되는 반복되는 상황과 현실을 그대로 복제한 것과 같은 말과 행동이다. 홍상수 유니버스의 반복되는 상황이 가장 적나라하게 연출되는 작품은 아마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홍상수 감독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아마 배우를 통해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과 작품을 분리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의미 없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유사한 상황이 반복된다. 물론 그 반복되는 상황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정법적인 상황이다. 극 중 남자와 여자는 각 상황 속에서 다소 다르게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러한 반복되는 상황은 다른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도 연출된다. 그리고 반복이 작품들을 관통하여 반복되는 말장난 같은 연출이 반복된다. 분명히 홍상수 감독의 다른 작품을 보고 있지만 익숙한 상황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반복되는 것이다.
익숙한 이 반복을 어색하게 만드는 장치가 존재한다. 바로 홍상수 유니버스 특유의 유사 현실이다. 홍상수 감독은 인물들의 말투와 행동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연출한다. 이러한 말투와 행동을 관객들은 처음에 작위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 작위적으로 느끼는 순간부터 작품에 대한 어색한 감정이 발휘된다. 하지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말투와 행동들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행위자로서 너무나 익숙한 말투와 행동을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 말투와 행동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고 어색한 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유사 현실을 통해 홍상수 유니버스에는 익숙함과 어색함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존재한다. 긴장감은 한 작품 내부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들이 구성하는 홍상수 유니버스를 관통하며 반복된다. 그리고 여기서 니체의 ‘영원한 회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영원한 회귀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본격적으로 예술 속에 녹아든 니체의 핵심사상이다. 이 복잡하고 명확하지 않은 사상을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해할 수 있도록 예시를 들어 이해를 돕고자 한다.
나는 지금 홍상수 유니버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현생이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생이 시작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나는 지금과 똑같은 시간에 홍상수 유니버스에 대한 글을 쓴다. 이러한 행위는 영원히 무한 반복된다. 이러한 행위는 조금씩 차이를 가질 수 있지만 내가 지금 홍상수 유니버스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홍상수 유니버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행위는 지금까지의 나의 과거가 함축된 현재의 행위이며,이 글이 나의 삶에 영향을 줄 미래 함축적인 행위이다. 나는 그러한 연장선 속에 한 존재로서 존재한다. 지금까지의 나로 인한 결과이며, 앞으로 나에 대한 원인으로서 지금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무한히 반복돼도 지금 내가 홍상수 유니버스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난해하고 추상적인 사상은 홍상수 유니버스와 만나 흥미로워진다. 앞서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이 자기 복제가 아닌가 하는 비판을 소개했다. 이 비판들은 ‘영원한 회귀’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
홍상수 유니버스는 홍상수 감독이 설계했다. 그리고 그 유니버스에는 그가 설계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설정값을 입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특정 상황 속에 투입하여 남자와 여자의 설정값을 통한 결과값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즉 상황이란 것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럼에도 홍상수 유니버스에 설정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설정값이 이미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똑같은 결과값이 영원히 무한 반복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홍상수 유니버스라는 영화 속 세계관은 이것을 가능케하는 가공의 세계이다. 홍상수 감독이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라는 인간들의 설정은 그들이 가진 전부이다. 매 작품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일정한 결과값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홍상수 유니버스의 영원한 회귀를 통해 홍상수 감독은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 무언가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무언가를 온전히 수용자의 몫으로 맡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수용자들이 어떠한 평가를 하는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는 자신의 유니버스를 보여줄 뿐이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듯 나는 그를 ‘잘 알지도 못 하면서’ 그저 그의 작품을 보고 글을 쓴다. 잘 알지 못하기에 글을 쓰는 것이 어렵지만,동시에 재미있다.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자유롭게 넣어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마블의 유니버스에 열광하듯이 우린 홍상수의 유니버스 속에서 그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볼 수 있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반감을 갖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반감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다시금 살펴보길 바란다. 그리고 논란 가득한 그의 사생활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그의 작품마저 외면하는 것인지 한번 되돌아 봐주었으면 한다. 만일 그렇다면 한번쯤은 홍상수 유니버스에 와보길 바란다. 그의 유니버스는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짧은 글을 마치려고 한다. 글을 마치면서 내가 이 글을 통해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빼놓은 것은 없는지,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된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인 내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평생 동안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홍상수 유니버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그가 아니고, 나는 그를 잘 알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그를 온전히 글로써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이 글을 통해 홍상수 유니버스를 방문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