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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씨 Nov 14. 2022

무궁화호를 타다가 책을 만들다

어느 열차 여행자의 책 만들기

남편과의 연애 시절, 우리는 틈날 때마다 남쪽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낡고 빛바랜 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익숙한 잿빛 빌딩 숲은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푸르른 산과 강 그리고 들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풍경이다.


이제 부부가 된 우리는 아이와 함께 무궁화호를 즐겨 탄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이제는 삶의 필수 이동 수단이 열차인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게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고나 할까. 

며칠 전에도 나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남쪽 나들이를 나왔다가 승객이라곤 한 명도 없는 시골역 플랫폼에 가만히 서 있었다. 플랫폼으로는 우리를 싣고 갈 오래된 무궁화호가 느릿느릿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는 앞부분이 빨간색인 일반 무궁화호와 다르게 파란색이었는데, 무궁화호를 개조한 바다관광열차 '해랑'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그날 본 것은 전 객차가 다 해랑은 아니고, 일반 객차와 해랑이 뒤섞인 버전이다. 어쨌든 나는 해랑의 클래식하면서도 예쁜 디자인이 맘에 든다. 그리고 나는 무궁화호 자체에 유독 애정이 깊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남편과 나는 여름휴가를 맞아 무궁화호를 타고 전남 보성을 여행 중이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더욱 선명한 초록빛으로 도드라지는 언덕길의 작은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칠 때 하얀 우비를 뒤집어쓴 한 무리의 학생들을 발견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학생들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시골 버스를 기다리며 빗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다들 목에 뭔가 티켓 같은 것을 걸고 있었는데, 당시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생용 열차 패스인 ‘내일로’로 열차 여행을 하는 학생들이었다. 


‘요즘엔 저런 패스도 있구나. 내가 대학생이었다면 분명 저 학생들처럼 여행했을 텐데.’ 부러운 감정이 밀려드는 한편,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갈팡질팡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안쓰러움도 느껴졌다. 나는 평소 여행서를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면 반드시 저 학생들을 위한 열차 여행 책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얼마나 많이 팔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책이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책일 거라는 확신, 그리고 그 책을 만드는 사람은 나여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게 맘속에 자리 잡았다.


서울로 돌아와서 다니던 출판사에 기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나는 몇 마디 설득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여행책을 많이 내는 곳이긴 했으나 주로 유명인의 해외여행서를 펴내는 출판사였고, 이미 계약이 성사돼 작업이 진행 중인 책도 상당했기에 내 기획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대학생들을 위한 국내 열차 여행책이라니, 너무 순진한 발상이 아닌가, 대학생들이 교재 살 돈도 없는데 여행 책을 사겠나,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간 기획서를 묵혀뒀던 나는 그 출판사를 퇴사하고 규모는 작지만 내공이 있는 여행서 전문 출판사로 입사했다. 여행서에 관한 남다른 소신과 철학을 지닌 곳이었기에 이곳에서라면 내 기획을 받아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이제껏 해외여행서만 출간해오던 출판사 대표는 내 기획에 매우 관심을 보였다. 출간이 결정되고부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전국의 주요 열차 노선을 중심으로 한 각종 여행 정보, 지역별 세부 명소를 목차로 한 책의 구체적인 꼴이 만들어졌고, 이제 막 여행작가로 첫발을 내딛게 된, 열정과 패기로 눈이 반짝이는 젊은 작가가 섭외됐다.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맹렬하게 돌며 열차 여행을 취재하는 동안, 나는 책에 넣을 정보들을 뒤져가며 편집 작업에 쏟아부었다. 주말에는 직접 취재를 나가 서울 근교의 사진들을 담아 오기도 했다. 책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아직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책의 기획자라는 부담감 또한 컸기 때문에 나는 평소보다 몇 배로 공을 들였다. 책에 실을 만한 마땅한 노선도도 없어서 주말에도 출근해 코레일 본사와 역 사무소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가며 노선도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코레일에서 당시 제공하던 노선도는 폐역과 무정차 간이역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실제 여행자들이 활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진을 전공한 후배에게 전국의 열차 역을 돌며 감성적인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 표지와 본문에 싣기도 했다. 여행서 디자인에 감각이 뛰어났던 디자인 실장은 전국의 노선들과 각 열차역을 한눈에 살펴보기 쉽게 디자인해주었다.


책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 제목을 짓기 위한 마케팅 회의가 열렸다. 나는 며칠간 고심해서 지어낸 책 제목들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그중 가장 맘에 드는 제목으로 내세운 건 '기차로 내일로'였지만,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단번에 와닿지 않는 감이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고민에 빠져있을 때 마케팅 부장이 앞뒤 순서를 바꾸는 교정 부호를 사용해 '내일로 기차로'라는 제목으로 돌려놓았다. ‘이거다!’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이렇다 할 광고도 없이 해외여행 가이드북의 판매율을 넘어서더니 순식간에 여행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내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정보에 목말랐던 학생들, 책을 통해 내일로 패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고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 학생 등 전국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우리의 책은 ‘빨간 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개정의 개정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2014년에는 ‘한국 관광의 별’ 단행본 부문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내가 좋아한 열차 여행에서 비롯된 작은 기적,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빛을 발한 결과였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행 책을 만들고 있다. 여전히 틈틈이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고, 플랫폼에 서서 무궁화호를 마주할 때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결는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는 믿음. 그리고 그 성과는 절대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협력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낡고 덜컹거리는 무궁화호에 오른다. 좋아서 하는 일인 동시에,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줄 거라 믿는 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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