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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씨 Feb 05. 2024

일본 열차 여행의 낭만

노면전차부터 특급열차까지, 달리는 즐거움

열차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본은 참 매력적인 나라다. 길고 긴 열도를 잇는 열차는 종류도 모양도 가지각색인데, 고속열차 신칸센부터 기관사 혼자 운전하는 2량짜리 원맨카,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동네를 훑고 지나가는 노면전차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돈을 내면 내는 대로 멋지게 치장한 특급 열차도 종류별로 타볼 수 있고 기간 한정으로 운행하는 캐릭터 열차도 끝없이 등장한다.


교토에서 코난 마을이 있는 돗토리현까지 가는 슈퍼 하쿠토 X 명탐정 코난 열차
오사카와 고베를 오가는 한큐 전철 X 치이카와 열차

많고 많은 일본의 열차 중에서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열차는 시골마을을 달리는 짧은 노선의 작은 열차다. 군데군데 빈 좌석에는 햇살이 내려앉았고, 단출한 낮은 주택과 산야가 이어지는 창밖의 단조로운 풍경이 아련한 열차. 자그마한 역에 내릴 때면 오래된 플랫폼에서 무심하게 탑승하는 어르신이나 엄마 손을 잡고 천진난만하게 오르내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일도 즐겁다. 지극히 일상적인 타인의 시간 속에 나 홀로 여행자로서 존재한다는 감각을 갖게 되는 순간으로, 대도시의 통근열차에 탑승하면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세련된 오피스룩을 갖춰 입고 꼼꼼하게 화장한 여성들, 무거운 백팩을 앞으로 메고 넥타이를 동여멘 채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성들을 보면 나만 여행자인 것이 슬그머니 불편해지곤 한다.


구로시오 특급열차에서 바라본 와카야마의 바닷 마을 풍경

이번에 새로 개정한 《디스 이즈 오사카》 2024~2025년 최신판에는 그간 계획하고 있었던 와카야마현을 취재했다. 와카야마현은 간사이 지방에서도 가장 열차가 다양하게 발달한 지역이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와카야마는 지형이 험준하고 마을마다 특징이 다른데, 그만큼 열차 노선이 많고 고양이 열차나 생선 열차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진 관광열차들도 다닌다. 가이드북 지도 장인인 디자인 실장님도 노선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얼마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덕분에 나는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특급열차부터 귤밭을 달리는 소박한 열차까지 좋아하는 열차들을 종류별로 타볼 수 있었고 잠시 망각했던 여행자의 여유를 다시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무작정 시골 열차의 낭만을 꿈꿨다가 여유는커녕 여행을 망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시골 열차는 그만큼 이렇다 할 쉴 공간이 없는 인적이 드문 곳을 달리고 배차 간격이 길거나 운행시간이 일정치 않다. 대학생 때 가고시마 남쪽 끝에서 원맨카를 타고 달리다가 바다가 가까운 마을에 무작정 내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역이 간이 승강장만 있는 무인역이고 몇 시간이나 걸려서 숙소가 있는 도시로 가는 상행선이 이미 운행을 멈췄다는 것을 내리고 나서야 알았다. 등줄기에 땀이 주르르 나면서 한적한 바다 마을 풍경이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행방불명되는 여행자가 되면 어떡하나 겁이 덜컥 났다. 시골 풍경이 좋다면서 무방비 상태로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다. 

물론 요즘엔 언제 어디서나 나를 구해주는 스마트폰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니 그렇게까지 대책 없는 일은 생기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년 개정판에도 취재를 핑계로 또다시 일본 열차에 오르려 한다. 

자, 이번엔 어디를 달려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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