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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Nov 15. 2023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화를 냈다.

#육남매스토리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늘상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었다. 평소엔 맑은 하늘처럼 잠잠하지만, 구름이라도 잔뜩 낀 날이 되면 여지없이 누군가는 화를 내고 있었다. 술이란 요물이 몸속에 들어오면 품고만 있던 화가 몸 밖으로 튀어나와 가족들에게 휘둘러졌다. 먼저는 아버지가 그랬다. 그리고  오빠가 그랬고  큰 언니가 그랬다. 막내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술을 잘 못 마시는 둘째 언니 셋째 언니 역시 맨 정신으로 화를 자주 휘두르곤 했는데 그 화의 마지막 도달지점은 나였으리라. 가 난 사람들 틈에서 자란 나 역시 늘상 뭔가에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짜증을 부렸다. 세상만사 온통 마음에 안 드는 일 천지인 것처럼 이유 없이 꼬라지가 나곤 했다. 짜증을 주체할 수 없는 날은 발을 비비 꼬고 몸을 비틀기까지 했는데 도대체 그렇게까지 짜증날일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몸이 뻐근해지도록 비트는 주인장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난감했던 내 몸뚱이는 내내 그 기억을 몸에 새겨두었다. 짜증은 일요일 아침이면 찾아오는 나른하고 심심해 죽을 것 같은 묘한 감정과 함께 찾아왔다. 깜박 잊은 날도 있었지만 토요일 저녁이면 다음날 나를 찾아올 그 지루한 녀석을 떠올리며  멀리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 녀석은 특히나 전국노래자랑 할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딴따다 따라라라 뜨란딴따다다다다라~란 음악이 흘러나오고 인상 좋게 배가 나오신 송해할아버지가 마이크를 한 손에 들고 " 전국! 노래자랑!"우렁차게 외치면 지루하고 나른한 기운이 나를 쳤다. 그러면 나는 제발 그 지겨운 전국노래자랑 좀 그만 보자고 화를 냈고. 내 말이 안 들리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티비를 보는 언니들 때문에 짜증이 몸을 마비시키면  몸을 비틀거나 한쪽 벽에 두 발을 올려놓고 그 녀석이 사라지길 기다리거나 벌떡 일어나 근처 놀이터로 도망 친구를 찾아 헤맸다. 복사기 같았던 일요일이 그렇게 쌓이고 쌓여갔다.

 증상은 상당히 오래갔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얼핏 누군가가  채널을 돌려 전국노래자랑을 틀면 제발 그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다고 사정을 했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일요일 오후의 시간이 무섭도록 지루하고 나했던 기억은 스스로 돈을 벌고 어디로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차츰 사라졌지만, 전국노래자랑만큼은 아직도 보지 못다.  아마 언니들도 그랬을 테다. 똑같은 일요일은 똑같은 삶의 연속이었을 테고, 젊은 날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어디로든 쏘다니고 싶었던 언니들의 바람은 동생들에게 묶이고, 경제적 궁핍에 저당 잡혔겠지. 그래서 화가 났을 거다. 화를 낼 대상이 없던 둘째 언니는 어느 날 수건을 얼굴에 덮고 하루 종일 서럽게 울기도 했다. 세상만사 모든 슬픔을 혼자 겪고 있는 것처럼. 그 길고 큰 울음이 이해되지 않아.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묻곤 했는데 대답 없이 들리는 울음소리에 한숨만 지었던 나다. 장 먼저 결혼 한 큰언니의 화는 이마 사이 미간에 잔뜩 여있어 언제든 출동 준비 중이다. 서로의 대화가 거칠어지거나 지난날의 서럽고 억울한 일들을 되새김질할 때면 어김없이 출동하는 미간 사이의 깊은 주름. 그건 화의 자국이다.  나의 화는 아직도 전국노래자랑에 묶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죄 없는 송해할아버지와 노래를 뽐내는 참가자들에게 미안하지만, 그것만큼은 아직도 보질 못하겠다. 누군가에겐 기다리지는 일요일의 즐거움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화를 낸다. 별 것 아닌 일에 감정을 쏟아 낸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거나 돌아서면 내가 언제? 라며 딴 사람처럼 되묻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무책임한 화를 내기엔 너무 오래 살았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엔 혼자서 쌓아 온 시간이 너무 길다.  아무도 탓할 수 없는 화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전에 웃어버리자. 하여 오늘도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울 앞에서 혼자 웃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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