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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Nov 20. 2023

증조할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고조의 고조의 고조할머니라도! 있다면 좋다!

퇴근 후 커피 한잔에 유튜브 삼십 분이란 유혹을 뿌리치고 식탁에 앉아 중세 국어의 이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훈민정음언해 원문을 읽어가며 문법 요소를 분석한 각주를 공책에 정리고 하나라도 머릿속에 장기 저장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자가 만들어진 직후 그 문자로 책을 쓴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듯 어여쁘게 새문자를 썼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두부 같은 글자들을 소리 내서 읽으니 내 마음도 조금 느슨해졌다.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던 단어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도 들었다. 둘째가 돌아오기 전 혼자 머무는 오후시간 최상의 집중력으로 중세국어를 공부하는데 마음이 한껏 즐거웠다. 배우는 기쁨이 마음 언저리 어디선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이내 온몸으로 퍼져 나는 발끝조차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세계에 머물렀다. 물론 길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한 순간이 영원처럼 기억되는 게 인생이니까.  


요 며칠 배가 더부룩하고 아프다는 둘째를 데리고 병원을 갔을 땐 일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의사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피곤에 쩔은 얼굴과 지겨워 죽겠다는 손놀림, 목의 까닥거림, 입술의 실룩한 떨림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 많이 힘드셨나 봐요?"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진찰을 받았다. 의사지만 의사는 하기 싫고, 돈은 많이 벌지만 사람은 상대하기 싫고, 배 좀 아픈 걸로 병원을 찾는 이 한심한 아줌마는 더 싫고, 아 진짜 이 참에 의사 때려치워! 하는 그의 내면의 웅얼거림이 들리는 듯싶다. 어쨌든 우린 약을 처방받았고 알약에 아직 취약한 둘째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징징거리다가 " 그걸 먹는 일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야, 네가 해내야 해"라는 냉정한 엄마의 말 한마디에 세 컵의 물을 연달아 마시며 그것들을 뱃속으로 보냈다.


저녁 9시 반 다시 공부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김시습이었다. 금오신화를 쓴 그의 정신세계와 작품 스타일을 분석하는 과목이다. 김시습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아마도 엄청난 히트작을 연달아 써내는 드라마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뛰어난 상상력과 문장력이 있으니 되고도 남았겠지. 원귀와 인간의 사랑이야기라니, 이건 반지의 제왕에서 사용한 설정 아닌가? 요정과 인간의 사랑은 이루어졌건만,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의 두 주인공 이생과 홍랑은 끝내 헤어져야 했으니 역시 이별의 정한 '아리랑'을 쓴 민족 다운 설정이다.


10시가 넘어가자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어제부터 읽고 있던 이슬아의 <끝내주는 인생을> 펼쳤다. 몇 문장 읽기도 전에 내 마음에 웃음꽃이 활짝 폈음을 알았다. 독서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기분이랄까. 게다가 문장 하나하나가 왜 그리 좋은지. 자신의 증조할머니 이야기하며 이런 문장을 쓴다.


엄마와 엄마의 아빠와 그 아빠의 엄마를 동시에 품은 채로 노래를 하고 글을 쓰면서 저는 무언가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실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온 느낌. 내 몸이 그저, 재주가 흐를 만한 통로인 것 같다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 <71, 끝내주는 인상, 이슬아>


증조할머니는 나에게도 있을 텐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는 증조할머니의 사진까지 가지고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게다가 증조할머니에게 받은 재주로 글을 쓰고 있다니. 나에게도 그런 할머니가 있다면 증조가 아니라도 좋다. 고조면 더 좋을 거고,  고조에 고조를 넘어 어디쯤에라도 좋다. 하지만 나에게 재능을 물려줄 할머니가 있었다면, 아마도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진 않겠지. 그렇담 어떤가. 내 재능을 손주의 손주의 손주 중 누군가가 물려받아 더 큰 재능으로 키워내길 바라면 되지. 그때쯤 나는 지금 다 쓰지 못한 혹은 지금 완성하지 못한 문장들을 그 아이를 통해 완성해내고 있지 않겠는가!


91페이지까지 읽고 92페이지와 93페이지를 바라보다가 책을 덮었다. 더 읽고 싶은 아쉬운 마음을 누른 채 오늘은 독서는 여기까지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더 먹지 않고 내일을 위해 아껴두는 마음으로 말이다. 냉장고에 남겨둔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며 잠들 것이고 그것을 다시 먹는 순간까지 기다림의 행복으로 한 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좋아하는 일로 행복해지는 시간 오늘도 마땅히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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