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댕한 인문학

동물들에게 듣는 댕댕한 이야기 ‘우화’

by 쓰는 인간



"00아! 시간 됐어!"

만화는커녕, 텔레비전 보는 것도 별로 탐탁잖게 생각하시던 부모님께서 시간만 되면 꼭 보라고 말씀하셨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k사에서 지금도 계속 방영하고 있는 동물들이 잔뜩 나오는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이었다. ‘교육방송 인터넷 강의 봐야 해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유선 방송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동물의 왕국은 부모님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었다.

‘사람은 뉴스를 봐야지’ 이야기하시며 시간이 되면 칼 같이 뉴스로 채널을 돌리시는 아버지도, 지금도 한결같이 평일과 주말에 각자 다른 드라마를 보아도 헷갈려하지 않으시고 줄거리를 꿰고 계시는 나의 어머니도 그 시간만 되면 나를 불러 리모컨을 쥐어주셨다. 그 시간에 뉴스나 드라마가 있었어도 그렇게 해주셨을 거다. 나에게 있어 ‘동물의 왕국’은 뉴스였고, 드라마였으니까.



다시 봐도 빨갛네.


"쟤들은 왜 저렇게 빨개? 염색했어?"

암수 상관없이 분홍빛인 홍학의 놀라운 빛깔과 떼로 몰려다니는 누우 떼의 품격,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모든 순간은 나를 빨아들이기에 충분했다. 드넓은 세렝게티 초원이 이 작은 텔레비전 안에 담겼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인생이 있었다. 동물들은 나에게 분명 인생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거기 짙은 회색의 코끼리가 땅을 울리며 돌아다녔고, 수풀 속엔 조용히 암사자가 웅크리고 얼룩말을 노리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암사자가 사냥에 성공하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개도, 그렇다고 고양이도 아닌 것들. 하이에나는 물론 다른 온갖 짐승들이 사자의 저녁밥을 뺏으려고 불을 켜고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밀림의 왕 사자라고 해서 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강의 동물이라고 회자되는 아프리카 코끼리도 시간이 지나면 나이가 들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살기 위해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저 동물을 잡아 움키지 않으면 당장 새끼를 먹이지 못하는 가련한 어미도 있었다. 알고보니 동물의 왕국, 거기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더라. 오늘 치열하게 사는 사람 이야기가 거기 있더라고.


그래서였을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왕국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도 전에 동물에 주목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말하는 동물' 이야기를 했다는 거다. 동물들의 입을 빌려 나와 당신, 인간과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의 이솝 우화부터 프랑스의 장 드 라 퐁텐이 정리한 라 퐁텐 우화집, 왕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도의 판차탄트라, 풍자와 희화의 고전 공방전과 국수전을 필두로 한 우리나라의 여러 가전체 문학까지.


말하는 동물 이야기 '우화'는 전 세계 문명이 공유하는 말하자면 이전에 ‘영웅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해 소개한 신화와 영웅 이야기와 결이 비슷하다.


우화 속에서 우리는 ‘교훈’ 이상의 것들을 발견 할 수 있다.



물론, 우화는 신화에 비하면 허구성이 짙다. 신화는 적어도 그 당시에는 실제라고 여겨졌지만, 우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물이 말하는 이야기'다. 조금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볼까? 헛소리, 심지어는 ‘개소리’로 폄하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우화 이야기다.


실제로 누군가 우화를 ‘개소리’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의 세계 안에서 우화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물론, 그것도 우화를 설명해주는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무엇인가 아쉽다. 우화 안에서 우리는 ‘도덕적 교훈’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살펴볼 우화들 속에는 명확한 교훈이라고 말할 것들도 있지만, 오히려 다소 충격적이며,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 역시 들어있다. 말하자면, 인간과 인간 삶의 다양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우화라는 거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우화를 ‘인문학적’이라고,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신화와 영웅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여기에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오늘, 아니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주 노골적으로 동물들의 탈을 쓰고(그리고 때로는 인간과 신의 이름으로) 알려준다. 신화와 영웅 이야기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우화는 인간과 삶에 대해 빙빙 돌릴 필요 없이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이 사실을 알고 우화를 읽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우화는 개소리야’라는 말을 못 할 것이다. 오히려 ‘댕소리’라고 말할 것이다. 똑같은 것 아니냐고? 맞다. 사실 지금부터 늘어놓을 우화 이야기는 모두 ‘댕소리’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지점에서 ‘댕’ 하고 당신의 머리를 울리면 그것은 이제 또 다른 ‘댕소리’가 된다. 사람에 대해, 그리고 사람이 사는 세상에 대해 머리를 울리고 가슴을 울릴 이야기, 댕댕한 인문학을 이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