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은 늘 좋은걸까?

파리가 고깃국에 빠진 날

by 쓰는 인간

"자, 여기 보세요."


아이들의 시선은 앞에 있는 선생님에게 향했다. 투명한 유리잔에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가 콸콸 쏟아졌다. "어? 선생님, 그만 하세요. 넘쳐요!" 말하기 바로 직전 선생님은 기울인 손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갔다.

"우리 친구들, 오렌지 주스 좋아하나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란 병아리를 닮은 원복을 입은 이 꼬맹이 녀석들은 행여 ‘내가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는 걸 저 선생님이 몰라주면 어쩌나’ 생각이 들었는지 유치원이 떠나갈 듯 “네에!” 소리쳤다.

"선생님도 오렌지 주스를 참 좋아한답니다."

정말이었다. 거짓말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 큰 유리잔에 가득 담긴 오렌지 주스를 거침없이 마시는 선생님을 보고 우리는 잔에 꽉 찬 주스를 봤을 때 환호했던 것만큼 실망했다. 이후 다른 선생님이 "친구들, 잘 봤죠? 오늘 배운 내용을 생각하면서 오늘 간식으로 과일 주스를 마시도록 해요!" 말하지 않았다면, 나와 내 친구들은 대성통곡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꿀떡꿀떡 주스를 넘기는 소리도 없이 잔을 반쯤 비우신 선생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자, 이제 보세요. 아까는 꽉 찼었는데 얼마나 남았지요?" 어떤 친구들은 "반 밖에 남지 않았어요!" 퉁명스러운 소리를 뱉었지만, 또 다른 친구들은 "야, 그래도 반이나 남았잖아." 대꾸했다.

뒤에 이야기 한 그 친구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선생님은 "그래요, 우리는 반 남은 주스 잔을 보면서 '아 뭐야, 반 밖에 남지 않았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맞는 말이죠?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 할 수도 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불평 할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합시다!"


주스는 긍정을 알려줬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어떤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남자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실히 일군 모든 재산은 불과 하루 만에 도둑에게 빼앗겼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편지를 읽고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나를 위해 위로의 편지를 정성스레 써준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네. 하지만, 자네의 걱정과는 다르게 나는 매우 평안하다네. 도둑이 내 물건과 재산은 싹 다 가져갔지만, 내 생명은 건들지 못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나는 내가 남의 것을 약탈하는 이 악한 일에 희생당하긴 했지만, 오히려 이런 일을 자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네!'

이 남자는 이후 미국의 32대 대통령이 되는 루스벨트다. 그는 4번 연속으로 대통령을 연임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이런 기록을 세운 대에는 정치적 수완과 카리스마가 한몫했겠지만, 그 뒤를 따라 불행과 어려움을 뚫고 다시 일어섰던 긍정적인 사고의 힘 역시 계속해서 회자된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다.


윈스턴 처칠,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짧은 축사는 아직도 회자된다.



"포기하지 마세요!"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퇴임 후 맡은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뱉은 말이다. 그는 연단에 올라 약 1분 여간 침묵했다. 사람들은 침도 삼키지 못한 채 위대한 조국의 영웅이 명문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이어지겠지'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다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말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위대한 사람의 대단한 축사를 기대했는데, 고작 이것 뿐이란 말인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팔삭둥이 조산아로 태어나 말 더듬이에, 학습 장애 때문에 초등학교 때 이미 ‘이 아이는 가망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다들 알았기에, 중학교 때는 3년이나 유급하며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가 결국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지금 퇴임한 영국의 총리로 서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비난이나 야유 대신 존경을 표하며 일어섰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는데, 마지막으로 그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이상의 이야기들은 ‘위기의 순간, 긍정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이 중에는 당신이 익히 들어 아는 내용도 있고, 또 모르는 내용도 있다. 혹은 누구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경험쯤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학습된 긍정’을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정말 정신만 차리면 살 것 같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맞는 말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 갔을 때 살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절체절명 속 위기에도 분명 해결책은 있다. 하지만, 호랑이 굴 속에서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저 생생한 감각으로 호랑이에게 물어뜯길 뿐이며,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을 찾는 노력이 없으면 그저 무너진 하늘에 깔려 죽을 뿐이다.



파리가 뜨거운 고깃국 그릇에 빠졌다.
파리는 곧 죽게 될 것을 직감하고 이렇게 말했다.
“고깃국도 실컷 먹고 배도 부르고 목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 이솝 우화 '고깃국에 빠진 파리' -


죽음을 앞에 두고 '고깃국도 실컷 먹고 배도 부르고 목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말하는 파리의 태도가 어때 보이는가? '와, 죽음을 앞두고 긍정적인 것들만 생각하다니, 파리가 참 대단하구나!' 생각 할 수 있겠지만, 글쎄... 차라리 그래도 파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 비록 날개 한 장이나 다리 몇 개 못 쓰게 되더라도 '고깃국에서 빠져나왔다'는 결말이 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개가 낫다’는 속담을 몰라도, 우리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깃국에 빠져 ‘긍정적인 말’만 내뱉는 파리의 모습은 불편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긍정적인 태도와 말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에 무엇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두 가지 예를 가져왔다. 하나는 먼 나라의 이야기고, 또 하나는 필자가 직접 겪은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제임스 스톡데일. 그의 사례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나왔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베트남 전쟁의 포로가 되었던 미 해군의 장교가 있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잔인한 현실을 이기고 결국 살아남아 무사 귀환했다. 생존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말에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죠. 그중엔 ‘이번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풀려날거야’ 생각하다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 지나면 ‘괜찮아. 다음 부활절이 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긍정의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모두 자살하거나, 혹은 사형 당했어요"

그에 따르면 비관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강한 생존 의지를 보였던 사람들이 가혹한 포로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긍정적인 태도와 더불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졌다. 아, 당신은 전쟁 포로는 고사하고 총도 제대로 본적 없어서 공감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웃는 것이 보기 좋다’ ‘늘 긍정적인 모습에 감동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다. 물론, 예민한 사람도 긍정적이고, 자주 웃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는 예민하다. 특별히 어떤 역할을 맡아 일할 때는 더욱 그렇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어느 날 '반장을 하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네가 부반장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장이면 모를까 부반장이면 뭐, 보조니까 괜찮겠지' 생각하며 별 고민도 안 하고 함께 하겠다고 했다.


단독 후보였던 우리는 별 문제 없이 반장과 부반장이 되었다. 처음엔 별문제 없었다. 교탁 앞에서 말했듯 ‘반장을 도와 최선을 다하는 일’이 나의 의무였으니까. 그러니까, 묻어가는 거였다, 이말이다.



난 부반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제주도로 떠나는 날 일어났다. 담임 선생님이 웬일로 나를 급하게 찾으셨다. "야, 우리 부반장 어디 있냐?"


알고 보니 하필 그날 반장의 집에 큰일이 났고, 그 일 때문에 수학여행에 불참하게 되었다고 했다. ‘반장의 부재 시 담임 선생님을 도와 학급의 일을 한다’라는 부반장의 의무가 갑자기 떠올랐다. '큰일 났구나'

사실 나는 반장은 둘째치고 부반장도 그때 처음이었다. '별일 있겠어?' 생각하던 차에 정말 별일이 일어난 거다. 덕분에 나는 2박 3일 동안 담임 선생님과 우리 반 전체를 챙겨야 했다.


처음 해보는 그 일을 하느라 수학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린 뒤 바로 응급실로 갔다. 그래, 스트레스성 장염이었다.

그 이후로 종종 장염은 잊을 만 하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친구가 되었다. 대학에서 조별 프로젝트를 진행한 뒤라던가, 회사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뒤에 그 녀석은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나마 이 친구가 신사적인 것은, 절대 일을 하는 중에는 찾아오지 않고 무사히 마친 뒤 긴장이 떠나면 그때 찾아와서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사실, 글을 쓰는 시점으로 지금도 그 친구는 나에게 아주 찰싹 달라붙어 있다. 연말을 앞두고 해야 할 일,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터. 어쨌든, 하도 많이 겪으니 이제는 병원에 가기 전부터도 자가 진단이 가능하다.

‘아, 네가 왔구나’ 느낌이 온다. 만약 이 장염을 긍정적 태도와 생각만으로 물리치려 한다면, 나는 원시인보다 못한 사람일 거다. 적어도 그네들은 주술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자기들의 고통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바랐고, 행동으로 옮겼으니까.


긍정을 핑계삼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긍정의 힘은 대단해요. 그러니까 긍정적인 태도와 밝은 마음을 가지세요’라는 말을 아픈 사람에게, 그러니까 혹시 누가 나에게 던졌다면... 그래, 나는 착해서 웬만해선 사람을 때리지 않지만, 이런 경우엔 못 참을 것 같다. 욕은 아니더라도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뺨을 세게 후리는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래,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분명 그것은 침울해 있는 것보단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포로수용소에서 당장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나를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장염이 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 주술이든, 병원에 가는 일이든 말이다. 긍정적인, 아니 또 부정적이면 사실 뭐 어떻겠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 생각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가 아니다. 그 생각 뒤에 꼭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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