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가 멈추는 날

다섯 가지 재주를 가진 날다람쥐

by 쓰는 인간



일어나자마자 기온을 확인한다. '-12°c' 까만 퀼팅 재킷을 입는다.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모두 잠근다. 빨간 체크무늬가 있는 베이지색 목도리를 두른다. 장갑도 잊지 않는다.

덥다. 봄이 벌써 온 것 같다. 실제 기온과 체감기온은 가끔 다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생각과는 다르게 흐른다.

"아니 이걸 벌써 만들어?"

응답하라 2006에 대한 루머를 보았다. 나올 때가 되긴 했다. 응답하라 1997이 15년 차이를 두고 2012년에 만들어졌다. 마침 2006년도 15년 지났다.

신원호 PD가 다른 작품에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면 후속 편 제작은 시기상조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대중이 후속작을 원한다는 것. 그러니 이 드라마는 꽤 흥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결이 뭘까?

출처. 인스티즈


한국 드라마는 '기승전 연애'였다. 어디서든 연애를 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이런 클리셰를 벗어났다.

사랑 이야기를 아예 빼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 IMF 금융위기 같은 사회적 사건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였던 것들까지 담았기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주인공들이 어딘가에서 내 또래로 존재할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든다. 응답하라 1997에서 정은지가 연기한 성시원이 이런 캐릭터였다.

야자를 째고 부산에서 대구까지 공개방송 방청을 가는 것은 물론, 토니 안 얼굴 한번 보겠다고 며칠간 노숙을 했다. 팬클럽 임원이 되려고 혈서까지 썼으니 말 다 했다.

드라마는 아이돌 1세대였던 H.O.T의 인기를 이렇게 보여준다. 우리는 성시원이었거나, 그녀의 부모였거나, 혹은 형제자매, 친구였다.

이렇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H.O.T의 멤버 중 문희준과 토니 안이 MBC 예능 안 싸우면 다행이야 2020년 11월 21일 자 방송에 출연했다.

패널 안정환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지금 다시 활동하게 된다면 방탄소년단과 어깨를 견줄 정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토니 안은 ‘지금 그런 기회가 온다면 자신은 멤버조차 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멤버 개인의 실력이 활동할 때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더욱이 다재다능이 필수인 시대인 지금 활동을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만능 엔터테이너’ ‘다재다능’이라는 말은 연예계뿐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올라운더’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곤 했다

NBA의 르브론 제임스, 배구의 김연경, 그리고 루드 굴리트 같은 선수들이 그런 사례다.

루트 굴리트는 선수 시절 센터백과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수준급으로 소화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포지션을 두루 소화하는 올라운더였다.

이렇듯 골고루 잘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것 같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 어떤 날다람쥐처럼.



어느 숲에 날다람쥐 한 마리가 살았다. 어찌나 재주가 많은지, 이름답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 나무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수영도 잘했다. 굴도 잘 팠고, 달리기까지 빨랐다.

동물들은 이런 날다람쥐를 보며 ‘오서오능’ 다섯 가지 재능을 가진 날다람쥐라고 불렀다. 하지만, 다시 보면 이 녀석은 좀 우스웠다.

날 줄 알지만, 지붕은 못 넘었다. 나무를 오를 줄 알았지만, 타고 넘지는 못했다. 수영으로 골짜기를 건널 실력은 못 되었다. 달리기로 사람을 앞지르는 일도 없었다. 재능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할 줄 알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모습을 오서오능, 다섯 가지 재주를 가진 날다람쥐와 같다고 한다.

안 씨 가훈 중 ‘오서오능’ -



동물에게 오서오능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팔방미인이 있다. 여덟 방위 어디에서 보나 아름다운 여성을 뜻하는 이 말은 한국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좋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일본에서는 주관 없이 누구에게나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을 팔방미인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오서오능 이야기처럼 재주는 많지만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를 팔방미인이라 한다고.

‘Jack of all trades, and master of none’(잭은 뭐든 다 할 줄 알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네) 역시 갖가지 재주를 가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완벽하게 하는 것은 전혀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영미권 속담이다.

이렇듯 많은 문화권에서 조금씩 두루 아는 것보다 한 가지를 숙달한 모습을 선호해왔다.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적어도 하나는 미숙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배우 최민식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신세계 개봉 전 ‘아이돌 발연기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들에게 진짜 연기를 가르쳐 준 사람이 있습니까? 몰라서 그런 거죠. 모르는 건 죄가 될 수 없어요. 아이돌로서 성공하는 건 쉽습니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친구들이잖아요. 감독이나 선배들이 잘 가르쳐주면 누구보다 잘할 겁니다."

잘못된 것은 ‘이 드라마에 꽂아야 해’ ‘이거 하면 뜬다’ 식으로 그들을 몰아넣은 소속사의 태도라며 소신을 밝혔다. 재주 많은 날다람쥐를 양산하는 연예계에 일침을 놓았다.

이런 모습은 취업에서도 도드라진다.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의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현재 취업 시장에서 비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969명 중 52.7%(복수응답)가 ‘과도한 스펙 쌓기’를 골랐다고.

그들은 ‘안 하면 손해 보니까’ ‘다른 방법을 모르니까’ ‘다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계속 면접에서 떨어지니까’ ‘이제 와서 멈출 수 없으니까’ 같은 이유로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꼭 알아야 하는 정보 외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정보, 굳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TMI(Too much information)이라고 부른다.

요즘엔 TMA까지 있다. 이게 뭐냐고? Too much Ability. 굳이 필요하지 않은 능력이다. 필자가 만든 단어다.

변호사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사까지 난 것을 본 적 있다. 변호사가 공무원 시험에 지원하면 가산점을 주기 때문이라고.

전자기기나 자동차를 살 땐 '이거 오버 스펙 아닌가' 꼼꼼히 따지면서 입사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조건을 높이는 모습에 헛웃음만 나온다.

오서오능, 다섯 가지 재능을 갖춘 날다람쥐가 무능한 게 아니다. 진짜 무능한 건 책상에 거만하게 앉아 불필요한 스펙을 요구하는 그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도 굳이 필요 없는 능력을 쌓아야 한다. 취업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가 멈추는 날이 올까? 재능 하나에도 손뼉 치며 격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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