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와 까마귀
"아, 거 참 별 이야기를 다 하네!"
어머니의 목소리 너머로 큰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다. "왜, 뭘! 아들한테 이런 소리도 못 해?" 어머니는 퉁명스럽게 대꾸하시고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응, 아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편이다. 전화를 먼저 하는 건 거의 어머니다. "밥은 먹었니?" "일은 좀 어때?" 안부를 묻는 날도 있지만 "어휴, 내가 못 살아"로 시작하면 그날은 맞장구치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날인 거다.
"그걸 아직도 못 받았어?"
기가 차서 되물었다. 어머니의 말인즉, 아버지 앞으로 보험을 하나 들었는데, 보험을 해준 아주머니가 ‘보험을 들어줘서 고마우니 답례로 아주 좋은 프라이팬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더란다.
설 명절을 코앞에 두고 ‘갖다 주겠다’ 말을 했으니 당장 프라이팬을 써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게 웬걸? 2월이 지나 3월이 된 지금도 그 아주머니는 깜깜무소식이란다.
아버지는 '벌써 한참 지난 일인데 아직도 순진하게 기다리고 있냐'며 그냥 잊으라고 하셨다지만, 어머니는 그게 쉽지 않은지 계속 '아휴, 그 아줌마는...'라고 자꾸 말을 흐렸다.
“이럴 거면 왜 말했어?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앞에서는 큰소리 뻥뻥 치며 호언장담을 하던 이가 ‘내가 언제 그랬냐’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가 있다. 현실에서는 별 탈 없는 것 같지만, 우화 속에선 꼭 그런 행운만 따르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으악!"
외마디 비명소리가 깊은 숲에 울려 퍼진다. 똑똑하다고 스스로 떠벌리던 까마귀 녀석이다. 사냥꾼은 사슴 같은 걸 기대하면서 덫을 놓았을 텐데, 엉뚱하게도 까마귀가 걸렸다.
"아폴론이시여, 저를 덫에서 풀려나게 해 주신다면 유향을 바치겠나이다!"
높이 뜬 태양을 우러러보며 말하는 까마귀에게 아폴론이 나타나 ‘그 약속을 꼭 지키라’며 덫에서 까마귀를 풀어주었다.
다시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덫에 걸려 생긴 상처까지 싹 사라진 것을 확인한 까마귀는 연신 그렇게 하겠노라 말하며 하늘로 날아갔다. 하지만 까마귀는 이내 그 약속을 잊어버렸다.
"아이 씨! 또야?"
아폴론의 분노 때문이었을까? 까마귀는 며칠 후 또 덫에 걸리고 말았다. 태양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들려던 까마귀는 그제야 이미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아폴론에게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다른 꾀를 냈다. 이번에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에게 빌기로 한 거다.
"야! 이 못 돼먹은 까마귀 새끼야, 네가 위대한 아폴론에게 한 약속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걸 알고도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해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겠지?"
- 이솝 우화 중 '헤르메스와 까마귀 -
"그래, 고마워. 언제 밥 한번 살게."
"우리 꼭 만나요, 바쁜 일 끝나면!"
약속을 해놓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즉흥적으로 위기를 넘기려고 수를 쓰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약속을 깼을 때 상대방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넘어갔거나, 운 좋게 넘어갔을 수 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공수표를 날리거나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는 모습은 결국 자기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다는 걸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아니 뭘, 빈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순진하시네.‘ 말할 수도 있다. 글쎄,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언제 약속을 지키려나’ 기다리는 상대방이 바보 같이 느껴지는가?
혹 그렇다고 생각할 누군가를 위해 미국의 강철왕이었던 Andrew Carnegie의 말을 두고 간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