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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인간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2021년 5월 1일

by 김담유

근자에 페이스북 친구가 된 시인이 한 분 있다. 창비 계열의 리얼리즘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고 큰 상도 여럿 받으셨다는데 나는 잘 몰랐다. 사실 나는 2006년에 첫 시집을 낸 뒤로 문단에 거의 발을 끊다시피 해서, 컴퓨터처럼 줄줄 꿰던 현대 시인들의 계보와 등단 연차, 발표 작품과 수상 목록 등을 모조리 잊어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그렇게 살아도 별 불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운신 폭을 오히려 좁히고 압박하는 이런 관계의 아우라로부터 일찌감치 벗어난 나를 스스로 대견해하는 편이다. 해서 이분이 시단에서 꽤 주목받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쨌거나 친구를 맺었으니 타임라인에 그분 글이 올라올 때마다 성실하게 읽고 좋아요, 멋져요, 최고예요 등을 부지런히 누르며 나름의 의무(?)를 다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분의 글을 읽을 때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정갈한 시인의 글이 싫을 이유가 마땅히 없는데, 요 며칠 이 불편한 마음의 정체가 뭔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나는 눈길을 끄는 글뿐만 아니라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글도 깊이 유념하고 기억하는 편인데, 기실 내가 선호하는 것들 못지않게 꺼리고 싫어하는 것들도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중요 인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더 마음을 할애하고 내 마음이 어떤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는지를 더 곰곰이 들여다본다. 이유는 하나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테면 마음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이것이 내가 삶에서 추구하는 자유(自由)의 한 방식이다. 이런 습관은 명상을 배우면서 몸에 밴 듯싶다.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 메타 자아의 눈으로 나의 모든 명암을 돌아보기. 명상이 뭐 특별한 것이겠는가. 나를 알고 세상을 아는 하나의 창구인 것을.


그렇게 마음의 눈으로 이모저모를 분석하다 보니 며칠 불편했던 내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누구나 우러를 만한 기품과 줏대가 있는 문장을 쓴다(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니 당분간은 문장으로만 그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지사형 인물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사랑하고 대중이 숭앙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싫었던 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항상 곧은 말만 하는 그가 존경스럽기는커녕 너무도 선명한 이분법의 잣대로 세상의 선악을 재단하는 그가 자신의 언어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저 위 높은 곳에서 대중을 혐오하고 통속을 무시하며 자신이 세운 성벽 안에 갇힌다. 가령 그이에겐 김수영이 아니면 그 누구도 시인이 아니다. 김수영만이 시인이고 김수영만이 종교다.


배제의 논리에 깊게 침윤된 그이의 문장을 불편해하는 나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한 가지를 더 깊게 깨달았다. 그냥 무시하고 말면 그뿐인데 여러 날 고민할 정도로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그이의 문장에서 나의 문장이 곧잘 겹쳐 읽혔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의 어떤 면모가 그이에게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나는 꽤 오랫동안 사람과 세상을 ‘선’ 아니면 ‘악’으로 구분하고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나누어 양 카테고리에 쓸어 담는 일에 몰두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절대 나뉘지 않고 구분되지 않는 삶의 지대가 있음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점점 벌어질 뿐 절대 메워지지 않는 삶의 구멍을 마주했을 때 내 정신은 나가떨어졌지만, 삶의 점이지대에 두 손 두 발 들고 항복하자 오히려 삶이 나를 더 크게 품어주던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영화 <자산어보>가 IPTV 목록에 올라왔길래 만사를 제쳐두고 보았다. 조선 말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당한 실존 인물 정약전(정약용의 둘째 형)이 흑산도의 청년 장창대와 함께 『자산어보』를 쓰게 된 사연을 담았는데, 흑백의 스크린 위로 넘나드는 바람과 파도가 일품이었다. 또 정약전으로 분한 설경구와 흑산도 청년 변요한의 연기도 기대치보다 깊어서 몰입감이 좋았다. 그런데 내게는 무엇보다도 약전의 말 한마디가 오래오래 잊히지 않는다.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지만 사서삼경을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창대는 사학죄인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물고기 책을 쓰려는 정약전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창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약전이 어느 날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면서 이런 말을 건넨다.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신분도 생각도 꿈꾸는 미래도 모두 이질적이지만 세상의 끝 자산(玆山=黑山)에서 어느새 동질감을 느낀 두 사람이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는 내가 두고두고 본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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