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에고’라는 인류의 광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있다. 서양의 자연과학과 합리주의 사상에 기반한 이 믿음은 인간이 최정점에 놓여 있는 먹이사슬 피라미드로 종종 가시화되는데, 신체 능력이나 환경 적응력 모두 타 동물에 비해 뛰어나지 않은 인류에게 이 같은 위치와 자격이 부여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만이 가진 ‘이성’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할 줄 아는 힘을 통해 언어나 무기 등의 도구를 생산하여 타고난 악조건을 극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화를 창출해왔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 문화가 극단에 달했을 때는 오히려 전쟁, 학살, 자연 파괴 등이 스스럼없이 자행되었다. 인간성이 제거된 물신주의와 황금만능주의도 같은 배경에서 자라났다. 20세기에 들어서만도 같은 인간을 1억 명 이상 살해한 인류의 모순은 우리를 여러모로 곤혹스럽게 한다.
서양의 현자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인간의 이 같은 모습을 ‘광기’라고 표현한다. ‘광기’란 ‘악(惡)’의 의미를 함유하는 일종의 ‘무의식’, ‘무지(無知)’로서, 이것들은 모두 에고(ego)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에고란 ‘가짜 나’, ‘거짓된 나’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의 참된 나’와의 합일을 방해하는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생각’, ‘지성’에 의해 강화된다. 생각, 지성의 범주를 특징짓는 핵심 요소는 바로 이원성이자 분별심이다. 이것들이 나와 너를 나누고 아군과 적군의 개념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톨레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를 통해 이 모순적인 현상을 명확히 목도시키며, 정치사회학적 비전을 넘어서는 심오하고도 본질적인 영적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음은 내가 아니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이런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를 되물으며 고통 속에 삶을 절망하던 스물아홉의 한 청년은, 어느 날 불현듯 그런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평소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자신, 둘 중 무엇이 진짜인지를 ‘낯설게’ 물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은 일시에 모든 작동을 멈추고, 의식만이 생생해진다. 그날 알 수 없는 에너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는 두려움과 저항의 태도를 버리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텅 빈 공간 속으로 아득하게 떨어져 내려간다.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기억을 잃은 채 창 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난다.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 ‘다이아몬드가 소리를 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소리’일 거라고 여겨지는 소리를 생생히 들으며 그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을 불행과 두려움의 대명사로 여기던 ‘나=에고’는 가짜라는 사실을,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구라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톨레가 젊은 시절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공(空) 체험을 통해 ‘본래의 순수한 나’를 발견하고, 그런 자신과 매순간 확고부동하게 하나되는 방법에 대해 오랜 시간 탐구해온 매우 유효하고도 핵심적인 지침들을 담고 있다. 무궁무진한 의미와 가치를 내장한 톨레의 메시지를 단문으로 요약하여 전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일별해보자면 마음의 현상학에 속지 말라는 것!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할 때, 고통이 발생한다. 이때 마음은 생각과 동의어. 톨레에 의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일종의 질병이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은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시간도 없고 죽음도 없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깨어 있음으로 해서 충만한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면, 환상과 고통으로 다시 복귀하지 않고 참된 복락과 평화 속에서 진정한 변화를 맛보고자 한다면, 복잡한 소음들로 붕붕거리는 마음의 스위치를 꺼야 한다.
‘지금’이라는 열쇠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아가 소거시킬 것인가. 톨레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깨어난 자, 순수 의식, 만물의 참된 실재에 접근하는 길은 ‘지금’이라는 좁은 문 외에는 없단다. 삶은 지금이기 때문. 지금이 아닌 삶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기 어렵다. 톨레에 의하면 지금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며, 지금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영원한 현재야말로 우리의 전체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남는다. 지금만이 마음이 제한하는 범위 너머로 우리를 데려간다. 지금만이 시간도 없고 형태도 없는 존재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과거란 마음속에 저장된 지나간 ‘지금’에 대한 기억의 흔적일 뿐이며, 미래란 마음의 투사물로서 상상 속의 ‘지금’일 뿐이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으니 시간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 이를 깨닫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존재로, 시간으로부터 현재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여기에 이를 때 만물이 생생히 살아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에너지를 내뿜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톨레가 이처럼 ‘지금’을 힘주어 내세우면서 인간의 시간관을 깨부수는 까닭은 시간이 마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체험에 의하면 마음에서 시간을 제거할 때 마음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마음을 멈추게 된다. 마음은 훌륭한 도구지만 그것과 동화된다면 그것이 본래의 진정한 자신이라는 착각을 일으켜 여지없이 고통의 파고를 몰아온다. 톨레는 존재의 근원에 관한 한 충만한 기쁨과 심오한 평화, 절대 고요가 공존하는 상태 이상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번뇌의 끝이라고 했던 붓다의 메시지를 상기시킴으로써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 심오한 지혜와 통찰로 가득한 톨레의 이 책을 통해 손가락 너머에 가닿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덧말. 기원전 지구상에는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는 아틀란티스 제국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플라톤에 의해 처음 그 존재성이 언급된 아틀란티스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땅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지브롤터 해협(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해협)의 서쪽에 있던 섬으로, 이집트 문명보다 먼저 존재했고 당시 그리스나 다른 나라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문명의 최후는 대지진과 홍수의 영향으로 하룻밤 사이에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것이었다. 역사가 전하는 아틀란티스 사례는 자연 앞에 선 인간 문명의 허망함을 에누리 없이 드러내 보이며, 오늘날 자연에 의해 이런저런 경고를 받고 있는 인류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린다. 금세기에 출현한 인류의 현자들이 전하는 메시지 또한 여기서 멀지 않다. 톨레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긴다. “새로운 의식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납니다. 영적 에너지는 상황과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