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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생명학, 한국발 인문학의 한 가능성

글로벌 생명학 | 이기상 지음

by 김담유

데카르트 이후 ‘합리적 이성’의 폐단은 ‘도구적 이성’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구적 이성은,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을 둘러싼 환경, 즉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 결과 자연은 인간과 함께 어우러져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그저 맞서 극복해야 할 하나의 부품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진, 해일, 화산 폭발 등, 오늘날 지구촌의 인간 살림살이를 위협하는 자연재해들이 재앙의 수준으로까지 확대되며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는 이 묵시록적 국면 앞에서, 합리적 이성의 소유주로서 인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여전히 인간은 인간 중심의, 인간 위주의, 인간만의 세계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참되게 존재하는 길일까?


『글로벌 생명학―동서 통합을 위한 생명 담론』의 저자 이기상은 서양의 로고스중심주의의 폐단을 자못 심각하게 진단하면서 서양과는 다른 우리의 생명관을 복원할 것을 역설한다. 합리적 이성에 기반을 둔 서구의 기술 문명은 오늘날 환경 문제와 생태 문제를 낳은 주범이라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한국의 생명 사상, 생명 철학에 서양의 이성 개념을 뛰어넘는 한국인의 생활 세계적 이성이 자리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를 ‘살림살이의 이성’이라고 명명하면서 그 독특함을 감성과 영성의 융화로 특징짓는다.


이에 대한 전거는 다석 유영모, 함석헌, 김지하에게서 찾아지는데, 감성과 영성이 융화된, 삶과 실재에 밀착된 한국인의 생활 세계적 이성은 보다 합리적이어서 죽임이 아닌 살림을 위해 기능하며,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아닌 상생과 조화를 추구한다. 한마디로 ‘생명’적이다. 가령 김지하가 해월 최시형을 경유하여 재천명한 향아설위(向我設位) 사상, 밥 한 그릇의 사상, 삼경 사상 들은 생명 가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살림’과 ‘상생’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생명의 반대 극을 ‘죽음’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죽음은 생과 더불어 생명을 구성하는 인자로서, 생명의 반대쪽에는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죽임’이 놓인다. 서구의 근대와 과학기술을 토대로 한 현대 문명의 만연된 병적 현상과 생명 경시·망각·파괴의 현실은 바로 이 ‘죽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김지하가 자주 인용하는 수운 최제우의 ‘천지공심(天地公心)’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과도 소통하는 마음, 곧 하느님 마음으로서 우주만물의 마음과 통하고 그 죽음과 질병을 아파하는 마음이자 성질’로서 우주사회적 소통과 공공성을 표방한다. 이 개념, 이 마음을 따를 때라야만 ‘인간과 동식물과 무기물을 가까이 사귀어 감화, 변화, 진화, 완성, 해방시킨다’는 내용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이 가능해진다. 현대 생태학과 환경 운동, 생명 운동의 핵심 또한 이 ‘접화군생’에 담겨 있고, 모든 참된 예술과 문화의 핵심 목표 또한 여기서 멀지 않다는 것이 김지하의 생각이다. 저자 이기상은 김지하의 이런 생명 사상, 생명 운동에 지지표를 던진다.


오늘날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서양의 노력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성에서 출발하여 탈인간중심주의라 할 만한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생태주의다. 그런데 이기상은 20세기 생태윤리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가 도달한 ‘생태학적 책임의 원칙’이 ‘생명의 원리’로 변화되는 지점에 주목하면서 학계의 동향이 ‘생태’에서 ‘생명’으로 그 방향키를 돌리고 있음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생명’이란 것을 해명할 수 있는 서양의 학자는 몇이나 되는가? ‘생명’은 ‘환경’이나 ‘생태’와 달리 이성의 범주에서 포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에 따르면 생명은 인간과 환경 그 모두를 둘러싼 범우주적 개념이다. 이를 포착하려면 감성과 영성이 융화된 제3의 감각의 필요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에게는 이 감각이 학습되고 계발되는 것이라기보다 생래적인 것에 가깝다는 것이 이기상의 주장이다.


이기상은 ‘생명학’이 한국발(發) 인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시험 무대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를테면 2003년부터 4년 동안 김지하 시인이 주도하여 개최한 ‘세계생명문화포럼’이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수십 명의 환경학자와 생태학자, 환경운동가와 평화운동가들이 동서 통합의 생명 담론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수원세계생명문화선언문’을 발표한 경우를 그 예로 든다. 반사적으로 그의 『글로벌 생명학―동서 통합을 위한 생명 담론』은 유영모, 함석헌, 김지하 등이 보여준 생명 사상을 우리만의 독특한 생명 철학으로 정리, 연구하여 ‘생명학’이라는 인문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젖히며, 서양의 범주, 서양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새로운 지평과 새로운 인식의 틀을 확보한 ‘첫 사례’가 된다.


인문학의 위상은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현실 세계에 미치는 도구적 영향력보다 그것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삶과 앎, 물질과 정신, 유기물과 무기물, 육체와 영혼 등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층위에서 인간됨의 의미를 묻고 삶의 질을 논구하는 인문학은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한데 뒤엉킨 지점에서 진정으로 참다운 것, 그래서 모두를 살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할 때 힘을 갖는다. 그때 인문학은 학문을 넘어선다. 이기상에 의하면 우리의 생명학은 바로 이 인문학의 민낯을 곧장 실현시켜 보여준다. 그에게 사회 변혁의 현장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김지하와, 생명 운동을 펼치며 삶의 미학적 만개를 추구하는 김지하는 결코 분리된 인물이 아니다. 김지하에게 현실의 원리와 생명의 원리는 본디 하나라는 점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인문학으로서 생명학이 자리할 수 있는 처소가 아닐까? 서양의 환경학과 생태학이 제대로 된 인문적 질문을 탑재하게 된다면 한국 생명학과의 조우는 정해진 수순일 것이다.


하이데거를 위시로 한 독일 현상학에서 출발한 저자 이기상의 학문적 궤도가 한국의 생명학에 도달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정치 문제건 사회 문제건 환경 문제건 결국 모든 문제가 존재론에 귀착된다고 확신하는 그는, 종국에는 자연, 우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시각, 존재의 시각이 문제가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는 서양 철학을 가르치되 한국인의 시각(눈깔)을 가지고 한국의 현대 사상을 연구하는 길로 나아갔고, 그 길에서 평생 생명, 평화, 진리를 외쳤던 유영모, 함석헌, 김지하의 계보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 담론의 밑바탕에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다른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것을 천명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 땅의 민중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한국의 생명학은 바로 이러한 현실 원리에 탄탄한 기반을 둔 현상학이자 존재론이다. 生命學이 한국발 人文學으로서의 가능성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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