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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창녀들의 목소리, 생생한

역사 속의 매춘부들 | 니키 로버츠 지음

by 김담유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 매 장마다 새로 펼쳐지는 매춘 역사의 국면을 접할 때마다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독자인 내가 여자라서 그럴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무엇이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인 나를 흥분시켰는지를 규명해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이 책은 ‘매춘’이라는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여성 섹슈얼리티 전반에 대한 이해와 해명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 과정을 저자의 선험적 해석에 의지하지 않고 꼼꼼한 자료 읽기와 재구성을 통해 펼쳐 보인다. 나아가 여성 섹슈얼리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고, 규정되었고, 억압되었는가를 최종적으로 규명하데 초점을 모은다. 놀라운 점은 ‘매춘의 역사’를 이렇게 전면적으로 탐색하는 일이 단지 매춘부들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선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매춘 아닌 것들까지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매춘부’를 읽고자 책을 펼쳤는데 오히려 ‘인간’을 만난 격이랄까. 매춘을 통해 읽는 인간은 분명 커피로 읽는 역사, 빵으로 읽는 역사 들이 제공하는 것과는 다른 맛을 줄 것이다. 적어도 매춘의 역사는 커피와 빵의 역사가 주지 못하는 다른 종류의 긴장과 흥분을 담보한다. 그 긴장과 흥분이란? 음지에서 양지로, 매춘의 주소가 바뀌는 순간 발생하는 그 무엇이다.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권력(이라고 해두자)에 의해 감추어지고 은폐된 것들이 (처절한) 맨낯을 드러내는 순간은 어쩌면 긴장과 흥분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터이다.


무엇보다 이 작업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더군다나 저자 니키 로버츠는 전직이 매춘부였다. 매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그래서 잘 말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매춘부 당사자일 것이다. 너무나 분명한 이 사실이, 적어도 매춘의 영역에서는, 무시돼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매춘과 매춘부 관련 자료는 거의 모두 남성이 작성한 것이었다. 학문적 객관성을 주장하는 남성 학자 대부분이 창녀들의 고객층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매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면 매춘에 관한 남성의 글쓰기는 아마도 그에 버금가는 오래된 직업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잉크가 발명된 이래 남성 작가들은 창녀에 천착해온 듯하다. 글쎄,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창녀는 흥미로운 여성들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가부장적 소유제를 거부한 최초의 여성들이었다.”


저자가 명명했듯이 매춘부를 “가부장적 소유제를 거부한 최초의 여성들”이라고 규정하는 데 동의한다면, 매춘부는 계급 혁명을 넘어서는 위력적인 전위성을 가진 계급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그 전위성이래야 실제 현실에서는 미약하기 그지없겠지만 매춘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그 위력은 가히 계급 혁명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을 넘어설 것이다. 일례로, 매춘 없는 시대가 있었던가. 또한 매춘 없는 시대가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매춘의 위력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매춘의 상실 혹은 폐기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군림해온 가부장제 역사의 상실 혹은 폐기를 반어적으로 의미한다. 매춘은 가부장제의 ‘잔여물’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의 ‘본질’이기도 하다.


가부장제가 강력하고 유일한 제도로서 사회를 장악할 무렵 매춘이 어떻게 규정되었는가를 살펴본다면 이는 좀 더 분명해진다. 남성에 의해 ‘선사’라 명명된 시기, 대략 2만 5000년 정도 지속된 가부장제 이전의 시기, 그러니까 태초에 있었다던 모계 사회에서 여성은 ‘여신’으로 군림했었다. “여성은 현세에서 여신의 구현체로 여겨졌기 때문에 몇몇 여성은 공동체와 신 사이의 실질적인 연결 고리가 되었으며, 샤머니즘의 여성 사제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사제들은 신성한 의식과 접신무(接神舞)를 통해 여신의 창조력을 물질세계에 전달했다.” 이처럼 여성은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스스로 통제해야만 했다. 성(性)은 그야말로 신성한 것이었다(그렇기 때문에 통제해야 했다). 샤머니즘의 여성 사제들은 ‘성적 의례’를 집전했고, 공동체 전체가 이 의식에 참여해 생명력을 통한 무아경 속의 합일을 함께 경험했다.


그러나 호전적인 남성 중심의 유목민들이 기원전 3000년경 모계 중심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고 결국 여신을 숭배하는 부족들을 정복하고 굴복시켰다. 이 시기는 대략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에서 역사 시대 최초의 문명이 탄생하던 무렵인데, 이 문명(사회)은 모계 사회와 부계 사회의 혼합물로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다가 꾸준히 남성 중심 사회로 변해갔고, 새로운 형태의 결혼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아이의 부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했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신을 파괴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신을 몰아내는 것은 수천 년이 걸려야 할 일이었다. “사람들은 사원에서 고대의 성적 의례를 통해 여전히 여신에게 충성했으며 여성 사제들이 권력의 지위를 빼앗긴 채 축출되는 동안에도 이는 지속되었다. 이때부터 매춘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성한 여성인 동시에 매춘부였던, 즉 역사상 최초의 창녀였던 신전의 여성 사제들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신 숭배 전통을 고수하고 매춘을 직업으로 선택함으로써 ‘남성’에게서 독립하려는 열망을 분명히 나타낸 창녀들, 그들의 도발적인 섹슈얼리티와 한 사람의 주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춘부와 그들의 일을 둘러싼 법률이 점점 더 억압적인 형태로 변해갔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매춘과 관계된 모든 법률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으며(그 실현성과는 상관없이) 호소력이 있다. 이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저자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사태를 호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매춘부를 마치 세탁하고 교도해야만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그들이야말로 여성을 배반하는, 나아가 억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을 따를 때, 이제 매춘의 영역은 뒷골목의 잔여물일 수 없다. 남성은 물론이거니와 여성 자신에 의해서도 은폐되고 왜곡되고 나아가 비하돼온 매춘 그리고 매춘 여성은 무엇보다 권력의 자장 안에서 그 역할과 의미를 새로이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그리하여 권력의 자장 너머로 탈출하기를!). 이때 저자가 제시하는 ‘성 산업 노동자’라는 개념은 매춘부를 새롭게 명명하고 위치시키는 데 유효해 보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태도’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객관적일 수 없다. 나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갖지 않는 창녀, 즉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여성의 편에 섰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나는 편견을 가졌다. 매춘부들의 목소리 덕분에 언제나 이 작업은 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가끔 사제, 교수 의사 등, 전문가들의 온갖 종류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묻히기도 했지만 그 목소리를 완전히 잃은 적은 없었다.”


창녀들의 생생한 (역사적) 목소리는 책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흘러나온다. 이들의 목소리가 시시콜콜히 증거하는 역사의 이면을 누구라도 들쳐보기를 권한다. 일례로, 서구의 알 만한 성전, 성당들이 매춘 여성들의 화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 책은 그저 그런 미시사의 한 부류로 읽힐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금지와 함구의 영역을 들춘 이 책이 갖는 사료적 가치는 가히 작지 않다. 이 책과 같은 연구서가 시중에 열 권만 있다고 상상해보자. 열 사람만이라도 이 문제를 시시콜콜히 파고들었다고 상상해보자. 이 책은 어쨌든 ‘돌파’를 감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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