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문화사 | 게르트 미슐러 지음
내게 ‘자살’이라는 말이 최초로 각인된 때는 초등학교 3~4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자그마하고 말수 적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을 가진 그분의 아들이 뒷산의 나무에 목을 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분의 아들은 곧 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될 사람이었다. 어떤 사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제들을 양성하는 가톨릭대학교에서 쫓겨난 그분의 아들은 나무에 목을 매는 것으로 미련 없이 세상을 등졌다. 아들의 죽음이 있고서 얼마 후 그분은 땅을 팔고 집을 팔아, 혹은 팔 땅도 집도 없이 그 시골 동네를 떠나갔다.
한껏 낮춘 목소리로 풍문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동네 아낙들 사이에서 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추출해냈고, 그리고 알아차렸다. 죽음, 그것도 자살로 인한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각종 소문을 출산해내지만 정작 죽음의 산모는 말이 없다는 것을. 사후에 오고가는 사람의 말들은 일종의 처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살의 의미를 그렇게 배워나간다. 슬픔을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울부짖고 눈물 흘리는 일종의 슬픔의 의식을 통해 배우듯. ‘의미’를 배우는 방식은 늘 그렇게 관습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구한 인간의 역사는 그리고 인간의 관습은 자살을 용인하지 않았다. 게르트 미슐러에 따르면, 대승불교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자살을 아무런 제약 없이 용인한 종교나 사회,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의 인권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명패를 내세워 자살을 금지하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을 교회의 관리 대상 혹은 자산으로 인식했던 중세 기독교의 영향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고대 영웅시대에는 자살이 하나의 의무로 자리 잡은 적도 있었다. 카이사르가 부상하던 로마 공화국 시기, 반대파들은 거침없이 죽음을 선택했다. 네로 황제의 포악한 집정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원로원의 회원들과 정치인들은 부지기수였다. 당시에 자살은 거의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갔다. 그런 그들이 노예의 자살만은 금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놀랄 것도 없다. 로마의 상류층에게 노예는 곧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은 ‘순수한 자살 출정’이라 불러도 무방했고, 기독교 이단 종파들의 금식은 곧 순교라는 명패를 단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명예나 순교의 가치를 좇아 스스로를 죽였다(하지만 엄밀히 말해 자유 의지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살의 ‘개인’적 의미가 발견되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려야 한다).
서구의 기독교는 이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인격신 개념을 내세워 자살을 교회법으로 금했다. 그리고 자살한 시체에 처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죽은 시체에 공개 재판이 가해졌다. 자살한 시체는 땅에 묻힐 수 없고 장례식도 치를 수 없고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능욕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공동체의 윤리를 저버린 ‘죄인’이기 때문이다.
루터에서 비롯한 기독교 신앙의 분열은 곧 강력한 국가를 탄생시켰다. 종교의 자리를 국가가 대체했다는 것이 다를 뿐, 16세기와 17세기의 법전에는 자살의 도덕적 추방이 법령으로 제정되었다. 국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지식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국가는 인구를 관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자살을 기도한 사람은 이중 처벌을 받아야 했다. 신에 대한 거역, 왕에 대한 거역의 죄가로 말이다. 최초의 자살 옹호는 1610년 존 던(John Donne)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신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살을 비난하는 것은 신에 대한 범죄라고 역설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자유,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은 인간에게 맡겨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가 되기 전 100년 전에 나온 급진적인 것이었지만 1647년에 이르러서야 빛을 보았다. 존 던에서 출발한 자살에 대한 연민적 시선이나 옹호는 계몽주의 사상과 우울증의 발견으로 보다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자살은 이제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성직자의 손에서 의사와 심리학자의 손으로 넘겨진 것이다. 초기 근대 산업 사회에서는 방직공, 하녀, 날품팔이 등의 하류층 사람들이 도시에서 유독 많이 자살했다.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자살한 학생들도 생겨났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같은 작품은 그 같은 배경 하에 씌어진 작품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편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자살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자살은 곧 영국병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혹자는 영국 신문의 시시콜콜한 자살 보도가 곧 원인이라고 보기도 했다. “자살이 정신적 망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과 18세기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는, 자살을 교회의 도덕 잣대로 측정하는 대신 의학의 책임으로 돌리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계몽주의 시대는 다음 세기에서 자살을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의 하류층 사이에는, 자살을 하면 벌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과 자살을 멸시하려는 태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99쪽)
자살에 대한 서구의 대응은 이 같은 흐름을 골자로 낭만주의 시대,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현 세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유럽 아닌 지역에서 자살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책의 진가는 이제부터 발휘된다. 사티와 사두스 등의 힌두교의 자살 의식, 열반과 순교를 향한 염원으로서의 불교의 자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자살, 아프리카·인도네시아·남태평양의 자살, 그리고 독특한 무사 계급의 전통을 가진 일본의 자살 등이 차례로 다루어진다. 유럽 문화권의 자살에 염증을 느끼거나 너무 잘 알아서 진절머리가 나는 이들은 여기서부터 읽어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적인 것은 저자가 ‘자살’을 문화사의 한 측면에서 바라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자살이 종교나 철학의 전통, 정치적 여건이나 사회적 행동 규범을 통해 다양한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서양사의 각 시대에서 고착화된 인식을 통해 한계에 부딪쳤던 상황을 다루려 한다는 저자의 의지는 머리말에 명시돼 있다. 이 같은 작업을 시도하는 목적은 한 가지 의문 때문이다. “자살은 왜 개인의 자유 의지의 선택 사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각종 문헌들과 사례 연구들의 비교·대조를 읽어나가는 동안 저자가 제기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시대적 고찰과 지역적 고찰을 교차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점 같다. 다만 사례들의 ‘열거’와 ‘개요’가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자살에 대한 저자의 심도 있는 철학적 성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를 실천하는 책. 자살과 자유의 상관관계를 제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이 책의 끝 부분에 인용된 장 아메리의 글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그들은 오히려, 무기, 밧줄, 눈앞을 아찔하게 만드는 짙푸른 물이나 17층에서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는 아스팔트에 더 관심이 많다. 진지한 결정과 그에 따른 결단은 치명적이다. 삶으로부터의 해방도 치명적이며, 자유는 폭력적인 탈출이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으로부터 빠져나가면서 사라진다. 이렇듯 자살은 자유로 가는 숨 막히는 길이지, 그 자체가 자유는 아니다. 비록 이 길이 이별의 고통으로 점철된 가시밭길이라고 하더라도, 꿈 같은 아름다움은 파괴되지 않는다.”(233쪽)
* 이 책을 읽으면 각 시대와 지역에서 쓰인 자살 방법들과 사체 처리 방식을 두루 접하게 되는데, 묘하게도 그것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 차이가 뭔지 궁금한 사람에게는 이 책이 별 소용이 없을 듯. 이제 ‘전문용’을 찾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