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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죽음이라는 보편 혹은 필연, 그 문화적 고찰

죽음의 얼굴 | 니겔 발리 지음

by 김담유

읽기 고약했던 책 중의 하나. 부제가 알려주는 것처럼 ‘원시 문화에서 현대 문명까지 죽음을 통해 본 인류의 문화’를 만화책 보듯 낄낄거리며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매끄럽지 않은 번역, 충분히 교열되지 않은 문장, 수도 없이 발견되는 오탈자와 엉터리 맞춤법에 한숨만 터져 나오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복잡성’ 그 자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학자의 당연한 연구 경향처럼 보이는 민속지학적 풍물 소개가 이어지는가 싶으면 책은 어느새 여행기로 변해 있고, 여행기인가 싶으면 어느새 철학적 사색기로 변모해 있다. 그러나, 읽기 쉽지 않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관한 문화사적 연구서로서 이 책이 내장하고 있는 ‘씨앗’들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서구 유럽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죽음의 문화를 다루는 데에서 비롯하는 방대함은 차라리 부차적인 특장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저자의 반성적·비판적 사고다. 가령 인류학자인 그는 자신을 포함한 인류학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죽음이 무엇이며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류학자들이 선교사의 입장을 취하려 하는 건 옳지 않다.”(6쪽)


그래서인지 저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게 깔리는 첼로 소리를 닮아 있다. 그러한 목소리로 자분자분 전해주는 세계 각지의 다양무쌍한 ‘죽음’, 그것을 둘러싼 인간 삶은 자못 흥미롭다. 지루해질 만하면 마치 폭염의 들판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끼어드는 일화들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어느 장날 나는 동구 밖 고목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나물, 감자, 어린 가축을 데리고 산동네를 내려와 읍내로 향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꽤 지난 후 그 행렬은 이제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들은 옷가지, 설탕 그리고 쇠고기를 사들고 바위언덕 너머 고지대의 마을을 향해 이곳을 다시 지나가곤 했다. 장을 보았든 빈손이든 그들의 발걸음은 약간 비틀거렸고, 대부분은 적당히 술을 마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또한 새로운 소문도 아마 많이 들은 듯했다. 두서너 시간 거기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훤히 알게 된다.

멀리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자전거 뒤에는 큼직한 나물 보따리를 싣고 머리엔 녹색 모자를 눌러 쓰고 단추는 되는 대로 채운 채 기다란 녹색 비옷을 입고 소매는 짧아 팔이 보였고 맨발에 맨손목이었다. 그의 이름은 파스칼이었다. 그는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세우더니 땅에 주저앉았다. 이어서 그는 지쳤다는 표시로 아프리카인들이 흔히 쓰는 제스처를 보이더니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미소 지었다. 그러고 난 다음 그는 손가락을 허벅지 사이에다 문지르고 악수라도 청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태브 개이Taab gaay 있어요?”

파스칼은 그래도 도시에서 폼 잡고 다닌 경험이 있는지라 우리는 프랑스어로 말했다. 태브 개이, 그건 담배 있냐는 농담이었다. 그런데 그는 늘 우리를 볼 때마다 맨 먼저 자기 아내에 관한 말을 꺼냈었다. 그래서 그런 그의 태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당연히 그것이 그의 아내의 이름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녀는 지난 밤 죽었어요.”

그가 아내의 죽음에도 아주 냉정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그녀가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도와요족의 세계에선 이것은 간단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상에 의해 마법에 걸려서 혹은 서양 병이나 합병증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저 좀 어지럽다더니 죽어버렸어요!”

내가 더듬거리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을 때 그는 내 뒤쪽을 넘겨다보더니 손짓을 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돌아보니 그의 아내가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길옆의 풀잎을 따면서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와요족은 기절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면 누구든지 ‘죽은’ 것처럼 말한다. 죽음은 그들에겐 평범한 문제가 아니다.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도중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 부족엔 허다하다. 그 사람들이 정말로 죽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기절은 죽음과 같다고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 또한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죽음이 단순히 멈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종점이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는 한 과정의 일부분이며 때로는 그 반대 과정으로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53~55쪽)




인용한 일화는 죽음과 죽음 아닌 것의 경계선이 다소 애매하고 모호한 도와요족의 경우를 전해주고 있는데, 딱딱하고 엄격한 수치와 사료가 아니라 저자 자신의 직접 체험을 통해 환기시켜주고 있어 실감 차원에서는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실감’은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죽음의 문화’를 다루는 인류학에서는 좀 더 각별할 것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관계를 일직선적인 것으로 생각해온 서구와 연속적이고 순환적인 것이라 생각해온 비서구 지역을 ‘동시에 다발적으로’ 관찰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무엇보다 ‘죽음’을 살아 있게 한다.


이렇듯 저자가 배치해놓은 실감나는 통로들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각 민족의 신화나 장례 의식, 문상과 매장 풍습,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카니발리즘 들이 “죽음, 그 필연과 보편”, “사실 이전과 이후”, “죽음의 신화적 공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살과 피”, “정치적 죽음”, “죽음의 시간과 장소, 무덤”, “죽음의 메타포”,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쟁, 살인, 사형”, “죽음과 도박”이라는 흥미로운 소제(小題) 아래 다루어진다.


이러한 연구에 따르면 죽음과 죽음의 경계선에 대한 각 민족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고, 따라서 죽음을 둘러싼 문화 또한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죽음의 보편성 그 자체는 견고하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의 보편성은 우리의 세계가 보편성을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55쪽)


인간의 (죽음에 관한) 관습은 변화해왔지만 그 변화의 지점들은 결코 찰나적이지 않다. 땅에 묻힌 시신이 벌레들에게 살과 피를 내주고, 도기에 담긴 해골이 한 방울의 습기까지 모두 자연에 내어주는 동안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애도는 지속적으로 세세손손 ‘치러져’ 왔다. (애도 나아가 죽음에 관한) 관습, 그 뿌리는 깊고 그 역사는 유구하다.


그러나 관습은 자연이 부여한 것이 아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그것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아무리 파헤쳐도 결코 소진될 수 없는 풍부한 의미의 솔기들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죽음(에 대한 탐구)에 한번 맛들이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시시해져버린다. 죽음만큼 삶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게 하는 지도가 또 있을까?


저자 또한 이러한 생각에 동조한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죽음이 영원의 세계를 보는 창문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확대경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단일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문화들을 통해 결국 우리가 다다르게 되는 지점은 죽음의 보편성이다. “죽음은 자신의 얼굴을 감히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는 필연의 존재”(86쪽)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방법적’으로 얘기해주려는 듯, 서로 무관한 듯한 얘기들이, 그러나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철학적 목소리에 의해 290여 쪽에 걸쳐 펼쳐진다.




* 원제는 “Dancing on the grave : Encounters with Death”. 본 역서의 제목으로 쓰인 “죽음의 얼굴”은 본문에서 소개하는 어느 한 다큐멘터리 제목. “시체공시소와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는 이색적인 장례식 장면들, 제물을 올리려고 울고불고 사람들이 법석 떠는 장면”들이 담긴 필름인 모양이다. 박물관에 근무하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동료가 저자에게 이 필름을 보내주었다는데, 세관에서 압수당했다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과 동물의 죽음, 신체의 여러 부분을 절단하는 장면이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문득, 이 책에서도 인용하는 몽테뉴의 말이 상기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습대로가 아니면 서로를 야만인으로 부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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