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는 인간

피할 수 없는 한낮의 악마

한낮의 우울 | 앤드류 솔로몬 지음

by 김담유

읽는 데 품이 많이 들었던 책. 724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둘째 치고라도 ‘우울증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해서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생각에 생각이 덧대어져 슬렁슬렁 넘길 수 없었던 탓. 저자 자신이 심각한 중증 우울증을 겪은 데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월등한 ‘표현력’을 갖추고 있는 탓에 그야말로 백주의 악마를 직접 맞닥뜨린 것만 같았다. 읽는 동안은 이런저런 삽화들이 떠올라 다소 괴롭기도 했지만 책장을 다 넘기고 난 지금은 언제 그랬냐 싶게 홀가분하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우울증 경력이 있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우울한 기분과 슬픔을 늘 끼고 사는 이들, 그리하여 언제든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중증 우울증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는 이들, 나아가 우울증에 어떤 종류의 ‘편견’이라도 가지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미국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이 책을 “우울에 대한 모든 것. 우울증의 특징, 사회·문화·역사, 치료와 전망을 조리 있게 잘 엮었다.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지적 호기심과 잘 섞어낸 점이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의 매우 ‘정확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인의 경험담을 묘사하는 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조건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살, 중독, 정치, 진화 등, 우울증과 쌍으로 논의되던 것들을 ‘분별’하여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 무엇보다 신뢰가 간다(새로이 알게 된 지식도 적잖다). 개인의 고통을 사회의 환부로 확장시킬 수 있는 능력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세 번째 우울증 삽화를 겪기도 했는데, 삶을 마감하고 싶은, 아니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위축되고 무력화된 ‘한낮의 악마’를 무사히 견뎌낸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이 책에서 ‘고통’은 관념이 아니다. 적재적소에 배치에 우울증 환자들의 증언과 인터뷰들이 갖는 어떤 ‘생생함’ 때문만은 아니다. 우울증은 일정한 패턴을 보이긴 하지만 개인마다 치러내는 고통의 세목은 결코 정형적이지 않다. 한낮의 악마는 그것을 만난 이들에게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그리하여 ‘그 무엇’을 묘사하는 사람들의 표현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모두들 그것을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의 속성마저 갖는다. 미래에는 우울증이 결핵이나 에이즈의 자리를 대신할 질병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건 아닐까. 일례로 고통과 슬픔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있는가. 하다못해 우리는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어서 괴롭고 슬프고 우울할 때도 있다. 고차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언제든 고통스러울 준비가 되어 있는 ‘짐승’인 것.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건 바로 짐승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역설적으로 인간의 지적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알고자 할 것이며 실험하고자 할 것이다. 서구의 산업 혁명기를 거치며 더 일사불란해진 우울증의 증세들은 차차 범주화되고 차원화되어가고 있다. 이는 우울증의 종류와 정도의 척도가 곧 마련될 것임을 시사하지만 아직은 프로작의 혁명기에 불과할 뿐. 항우울제가 시판되기 시작한 건 50년도 안 됐다. 정신 질환에 소용되는 비용은 여전히 막대하고, 사회적 통념과 편견은 거대하다. 고통은 넘쳐나는데 고통을 중단시킬 수단은 한정돼 있고 미미하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병을 발설하는 순간 당신은 호전될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라고.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저자는 단순히 심정적 호소에 기대고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자료와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제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이 책은 우리의 본능과 정서와 인지의 영역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자극한다.


* 원제는 ‘한낮의 악마The Noonday Demon’. 시편에 등장하는 구절인데, ‘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 ‘낮에 날아드는 화살’ ‘밤중에 퍼지는 염병’과 더불어 인간을 신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마적 존재를 표상한다. 백주대낮에 돌아다니는 악마, 우울증을 묘사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그 점에서 원제를 살리지 않은 게 아쉽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