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에 따르면 세계는 일어난 일의 전부이다,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이 언명의 배후에는 ‘결코 말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영역’이 전제되어 있다. 말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영역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곧 비존재의 영역이다. 불가지의 영역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와는 구조적으로 다른 표상을 갖(으리라 예상되)는 영역이다. 아니, 표상을 갖지 않으며, 그리하여 인간의 언어로는 개념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일찍이 ‘침묵’할 것을 요구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는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는 바로 이 영역을 역설적으로 환기한다.
그가 이 영역에 관해 암시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표상과 개념 간의 인위성과 제한성, 표상과 개념을 잇는 논리적 형식의 비언어화를 꿰뚫어본 그에게는 언어의 산물인 ‘세계’ 또한 한계의 산물일 뿐이다. 혹은 언어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영역에 대한 표상을 경험적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사고할 수 없다. 즉 우리는 ‘그 세계’를 표현할 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세계’를 표현할 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 ‘그 세계는 없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훗날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폐기하고 일상적 언어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언어 자체의 기능과 유의미성을 탐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게 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의 사유는 여전히 풍부한 솔기들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1969)를 쓴 하이젠베르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의 경우는 더없이 풍요로운 은유가 되어준다. 논리학과 언어철학 분야에 비트겐슈타인이 있다면 물리학 분야에는 하이젠베르크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두 사람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영역은 영혼과 몸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그들이 이룬 업적은 영혼과 몸의 결합만큼이나 강력하고 실질적이다.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는 양자역학이 명실상부 20세기 나아가 현대의 과학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뉴턴의 역학으로는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원자 세계의 ‘불확정성 원리’를 창시한 이로도 유명하다. 그가 제창한 이 원리의 배경에는 일상적 경험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원리 혹은 영역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에 의하면 원자란 표상과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 본래가 그 어느 쪽도 아닌 존재다. 원자는 하나의 입자이지만 또한 파동이기도 하다. 즉 에너지이면서 물질인 것이다. 그가 설명하는 원자의 세계는 무엇보다 이 같은 ‘상보적’ 성질을 주 특성으로 하는 탓에 종종 실증주의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과학 이전의 사고로의 역행, 무해무득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말이다.
핵무기까지 생산되고 있는 오늘날에 실증주의자들의 이러한 해코지(?)성 발언은 코미디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20세기 초반 당시에 견해를 달리했던 학자들과 학문들의 논박 과정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 출현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치러야 할 진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원자 세계는 물리(物理)와 물리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작용’이 있는 곳, 이 작용으로부터 하나의 구조가, 하나의 성질이, 하나의 사물이 완성된다는 논리는 물리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인 것이다. 『부분과 전체』가 흥미로운 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모순과 역설의 현상, 그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물리학의 발전이 사회적 구조에서 철학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서 인간의 사고를 변혁시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자는 고도의 추상성을 갖는 수학적 언어로써만 그 체계를 설명하는 존재지만 결코 논리도 비물질도 아니다. 또한 원자 현상은 시공적(時空的) 서술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지만 인간의 실험과 인식을 허락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결코 말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영역’의 경계에 위치한 원자의 처소는 인간과 우주의 비밀, 그리고 신비의 문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미시물리학이라는 ‘부분’의 전문가이면서 삼라만상의 ‘전체’를 통찰하는 현자로서 하이젠베르크의 면모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원자물리의 무기화와 비도덕적 사용을 경계하고 실제로 거부하기도 했던 행동인으로서 그의 면모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 영역의 영향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그 자신도 거듭 말하듯, 부분과 전체에 대한 균형 있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우주 구성 물질의 최극단을 고찰하면서도 그 극점에서 우주에 대한 플라톤적 인식 즉 ‘전체적인 연관성’을 추출해내면서, 자연과학의 중심 질서는 궁극적으로 종교의 언어와 만난다고 말한다. 한데 종교란 실증과 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와 윤리의 영역이 아니던가. 그가 말하는 중심 질서란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진리가 숨어 있는 심연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에 있어서 진리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하이젠베르크는 후기 연구, 즉 소립자들의 대칭성에 대한 탐구와 통일장 이론을 통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질서에 대한 실험과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나간다. 『부분과 전체』는 한 물리학자의 학문적 변화를 좇는 평범한 전기물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양자역학이라는 원자 현상을 통해 우주 질서의 일단을 사유케 한다는 점에서 매우 문제적인 저술이 아닐 수 없다. 단순성 앞에서 전체성을 예감하게 됐을 때 하이젠베르크는 두렵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런 하이젠베르크에게서 종교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