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된 인간 | 토머스 트웨이츠 지음
걱정 없이 살고 싶어 염소가 되기로 결심한 남자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싶어 염소가 되기로 한 토머스 트웨이츠, 엉뚱하다 못해 황당하기 그지없는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런던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왕립예술대학에서 인터랙션 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미래가 촉망되는 멀쩡한 엘리트다. 어여쁜 여자 친구도 있고 부유한 아버지도 있다. 다만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고, 그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뿐이다. 맨손으로 원재료 구하기부터 전 과정을 직접 만들어 전시한 ‘토스터 프로젝트’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전시회, 테드 강연, TV 출연, 도서 출간, 해외 북 투어까지 남 부럽지 않은 행보를 이어왔다.
하지만 후속작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쏠리던 때에 뜻하지 않은 슬럼프가 그를 찾아왔다. 근심, 걱정, 스트레스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던 그는 또다시 엉뚱한 생각 하나에 사로잡혔다. “걱정 없이 살고파! 염소가 되어 알프스 산맥을 넘어보면 어떨까?” 마침내 그는 염소가 되어(애초에는 코끼리가 되려 했으나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 염소로 변경) 인간의 삶으로부터 잠시 휴가를 떠나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놀랍게도 이 황당무계한 계획에 런던의 생명과학연구소가 암 치료 연구비에 맞먹는 지원금을 제공하고, 장장 10개월에 걸친 실험과 도전의 나날이 시작된다. 그는 정말 염소가 되었을까? 네발로 알프스를 넘겠다는 계획을 완수했을까?
인간의 몸으로 염소의 마음에 다가가다
누구나 한번쯤 동물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태평하게 졸고 있는 강아지나 창공을 훨훨 자유롭게 가르는 새를 보거나 하면 말이다. 그러나 아무나 그런 생각을 직접 행동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젊은 총각, 토머스 트웨이츠는 불가능한 생각을 가능한 신체(사물)로 탈바꿈하는 데 탁월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보기 위해 알프스 염소가 되기로 한 그는,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인 태도로 염소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나간다.
염소의 영혼을 알기 위해 덴마크 주술사를 만나고, 염소의 마음과 몸을 탐구하고자 동물행동학자, 신경과학자 등을 만나 다양한 실험에 임한다. 그리고 수의사와 의수족 제작자 등을 만나 염소의 외골격(인공 다리, 헬멧, 흉부 보호대, 엄마가 만들어준 방수 코트, 뜯은 풀을 소화시킬 인공 반추위까지 갖춘)을 만들어 장착한 다음, 알프스 산맥을 누비는 염소 떼의 삶으로 뛰어들기에 이른다. 그리고 애초의 계획, 네발로 기어 알프스 산을 넘는 대장정에 나선다.
염소가 되어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 엉뚱하지만 지극히 실존적인 이야기
토머스 트웨이츠가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만한 엉뚱한 생각을 실제로 구현, 물상화하여 통념과 관습으로 가득한 세상의 새로운 의미, 특별한 가치를 재발견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시도는 무모한 실험, 또는 엉뚱한 모험 등으로 간주되지만, 그 시도 자체로 지극히 실존적인 탐구 보고서가 된다. 그의 이름을 처음 알린 ‘토스터 프로젝트’가 그랬고, 후속작 ‘염소가 된 인간’이 그렇다.
그는 인터랙션 디자이너답게 사물 또는 동물에 눈높이를 맞추고, 맨몸으로 토스터라는 사물, 염소라는 동물의 핵심에 진입하려 노력한다. 그들 삶의 조건을 편견 없이 탐사함으로써 자연스레 지구상에 존재하는 두 발 동물,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다. 염소가 되어 알프스를 넘었다는 사실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모험적인 시도를 통해 그가 가장 실존적인 인간의 상태를 보여준다는 데 진한 감동이 있다.
눈 쌓인 알프스 정상에서 깨달은, 단순한 삶의 기쁨
주술사의 힘을 빌려 염소의 영혼을 탐구하고, 동물행동학자와 신경학자의 도움을 받아 염소의 마음과 몸을 연구한 그는, 결국 인체를 이용하되 염소와 가장 유사한 형태의 외골격을 갖추고 겨울이 되기 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염소 목장을 방문한다. 거기서 사흘간 풀을 뜯고 이동하고 또 풀을 뜯는 염소들의 단순한 삶을 경험하면서, 특별히 그를 애정하는 18번 염소도 만나고, 염소 무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계’에 대한 고민도 품는다. 그리고 마침내 염소에게 동류로 받아들여진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목장주는 이 ‘미친’ 프로젝트를 감행하는 그에게 진의를 물은 뒤, 사소하지만 놀라운 진리를 전해준다. 근심, 걱정, 후회 등 인간만의 특질로 이해되는 것들이 실은 자연에서 멀어진, 복잡하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병폐라는 걸 말이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만 챙겨 인간 세계와 생활 세계의 복잡다단함에서 벗어나 염소처럼 단순한 삶을 따를 때, 어디서나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트웨이츠는 한결 가뿐한 마음이 되어 네발로 알프스 등정길에 오른다. 마침내 빙하 꼭대기,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에 선 그는 환상처럼 한 남자를 만나 고백한다. “어떤 사람은 새가 되는 꿈을 꾸죠. 저는 염소가 되는 꿈을 꾼답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삶으로부터의 탈옥이 필요할 때, 염소가 된 인간을 만나보라
집과 일터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건 무엇일까? 피곤에 찌든 몸을 누일 쇼파? 잠시 근심과 걱정을 잊게 해줄 드라마? 허기진 배를 급히 채워줄 배달 피자나 치킨? 아니 가장 값싸고 빠르게 심신을 이완해줄 알코올? 이런 비본질적인 것들로 빼곡히 채워진 일상에서 잠시간의 휴식, 잠시간의 쾌락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의 몸은 더 무거워지고 우리의 맘은 더 갑갑해진다. 그야말로 탈출, 아니 탈옥이 필요한 시점이 오고야 만다. 나의 경우 딱 이런 시점에 이 영국 총각을 만났다. “세상엔 이런 탈출도 있어”라면서 유쾌하게 말을 걸어오는,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말만 늘어놓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철이 덜 들었나 싶다가도 묵직하게 속이 들어찬 남친 같아서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황당무계하지만 진지하고 디테일한 그의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수시로 “음매애애애~” 장단을 맞추게 되었다. 염소의 몸을 갖추고 염소의 마음으로 풀을 뜯으며 염소의 영혼으로 알프스를 넘는 그의 생고생 프로젝트를 응원하면서, 나 또한 걱정 없는 염소로 살아보고 싶은 착각에 빠졌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이렇게 재미나게 ‘과학’으로 만들 수 있다니, 이 영국 총각, 나중에 크게 되겠구만! 지칠 대로 지친, 우울할 대로 우울한 작금의 한국 독자들에게, 그래서 이 책은 꼭 필요하다. 드넓은 알프스의 호연지기 사이로 유쾌한 염소의 영혼이 폴랑폴랑 뛰어오는 그림 한 장, 꼭 감상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