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 박산호 지음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한 달여, 무거운 책무와 버거운 관계에서 놓여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우울의 전조가 온몸을 감싸고 돈다. 가라앉고 가라앉고 가라앉는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마흔셋 내 인생이 의미도 결실도 없이 저무는 것 같아 울컥하는 심사가 된다. 멈추고 싶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미칠 듯했던 욕구는 어딜 가고, 정작 흘러넘치는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왜 즐기지 못하는 걸까? 세상의 속도와 관계의 관성에 의해 굴러가던 일상이 무너져 내리고 보니, 하얗게 살균된 공백처럼 주어진 이 자유의 시간이 두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집어 든 책,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그래, 내겐 지금 위로가 필요해...
이 책의 저자인 번역가 박산호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건 2016년 가을 무렵이다. 아버지의 존엄사를 둘러싼 세 형제 이야기를 담은 영국 소설의 판권을 확보하고 맞춤한 번역자를 물색하던 참이었는데, 어느 날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박산호라는 이름을 자주, 겹쳐, 보게 되었다. 나는 우연의 색을 입고 다가오는 동시성을 신봉하는 사람인 데다가 편집자 생활 20여 년에 이르고 보니 글쓴이가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 쪽글만 봐도 감이 온달까. 와, 이분 베테랑이신걸. 주로 장르 소설을 번역하셨지만 이 무겁고도 진지한 소설을 충분히 감당해주실 것 같았다. 예감은 적중. 거기다 2000매 가까이 되는 소설을 단 두 달만에 탈고하시겠다고.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가능했다. 정확히 두 달 만에 보내주신 완역 원고를 읽어내려가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속도에 이 완성도라니! 박산호라는 존재 자체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를 읽고 나니 번역계의 괴물처럼 느껴졌던 선생님이 작고 여린 그래서 매력적인 한 인간으로 다가온다. 생계를 위해 번역하지만 자신을 위해 그 일을 즐기기로 마음먹은 사람. 의지와 강단의 아이콘이지만 애초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스스로를 벼리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싱글맘이자 워킹맘으로 이 정글 같은 세상을 홀로 대면해야 했을 외로움, 괴로움, 슬픔의 날들을 짐작하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프고 절로 존경심이 인다. 이 책은 진짜 어른, 좋은 어른이 되자고 권유하는 책이지만 바로 선생님 자신이 진짜 어른, 좋은 어른임을 증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 증명의 방식이 화려한 성공담보다는 솔직한 실패담으로 넌지시 건네는 위로의 화법이어서 더 좋았다. 자신의 삶을 소재로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용기, 그게 참 아름답고 선생님답다 싶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쓴 옮긴이 후기를 읽고 느낀 바가 있는데, 선생님은 캐릭터들의 성격과 일생을 핵심적으로 짚어내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다. 소설 번역을 많이 하셔서 그런가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힌트를 얻었다. 인간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 남달라서라는 걸. 애정이 남다른 만큼 꿰뚫어보는 안목도 깊다. 그래서 기대하게 된다. 허구의 인물이든 실존의 인물이든, 언젠가 선생님만의 프레임으로 그려낸 이 시대 만인보를 읽을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아마도 그 책이 쓰여진다면 수많은 독자들이 말로 다 못할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236쪽, 국판 사이즈의 얇은 책이다. 한나절만 집중해도 후딱 읽어치울 수 있다. 하지만 왠일인지 나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천천히 읽어나갔다. 한 사람의 생을, 그 생에 연결된 무수한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일이기도 해서 아껴 읽고 싶었다. 그렇게 사연마다 음미하다 보니 어느새 동이 터온다. 밤을 새워 책을 읽는 일이 얼마 만인지. 책을 읽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푸는 일은 또 얼마 만인지. 실패해도 괜찮아, 그 실패가 너를 너답게 만들어줄 거야. 너를 어른으로 만들어줄 거야. 가만히 건네진 속 깊은 위로. 꼭 나를 위해 쓰인 책인 양. 이 책을 써줘서 감사해요, 산호 선생님!
"넌 글을 잘 써. 감성도 좋고 네가 쓴 글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네가 나중에 꼭 글을 쓰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을 때 사실 믿지 않았다. 대학교 때 나는 극심한 자기혐오와 회의에 사로잡혀 나란 인간은 도무지 잘하는 게 단 하나도 없으니 대체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니. 내가 대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는 출판의 황금기로 100만 베스트셀러가 빵빵 터지던 시절이었지만 대신 책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문단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로 글은 천재나 비상한 문재가 있는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들만 쓰는 거라고 생각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감히 나 따위가? 그때 친구의 말은 믿지 않았지만 그 말이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의 씨앗을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뿌려준 건 사실이었다. _"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힘"
그때 오래전 할머니의 만트라가 떠올랐다. 할머니가 그때 의도했는지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삶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태도 덕분에 나도 배울 수 있었다. 할머니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나이는 먹었는데 어른은 되지 않은 요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고달파도 어느 선에 이르면 변명하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책임져야 할 때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니까. 그때 어떤 태도로 그 책임을 대하느냐가 어떤 어른이 되는지를 좌우한다. _"인생에 변명하지 마"
살면서 아프고 힘들었던 날은 누구에게나 쇠털처럼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인생을 살면서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을 때 친구들과 지인의 열화와 같은 반대를 샀던 적도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힘든 마음에 비수를 찌르는 말도 몇 번 들었다. 다 조언을 가장한 비판이나 심판이었을 뿐이다. 나 역시 친구에게, 후배에게, 제자들에게 그랬을지 모른다. 나만 기억을 못하거나 아예 의식도 하지 못했을 뿐. 타인의 아픔을 내 관점에서 해석해서 지적하고 개선하려 들었을지 모르고. 악의 없는 말이었지만 상대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해 상처 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라도 내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경계할 수 있어서 다행인 셈이다. 덕분에 전보다 더 성숙한 엄마, 더 현명한 어른으로 아이의 아픔을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아닌 내 옆의 다정한 타인들에게도 그리 해야지. _"그냥 들어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