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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는 곳을 상상하는 힘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 김융희 지음

by 김담유

솟대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세 마리의 새가 있다. 새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일까. 새들은 응시할 뿐, 그곳을 직접 가르쳐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곳을 암시할 뿐이다. 새들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딘가'는 존재하는 듯하다. 솟대 위의 세 마리 새, 그리고 그 새의 그림이 암시하는 곳. 그곳은 말이나 논리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곳이겠다. 교육받아온 대로 혹은 습관적으로 그 그림만을 보자면,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태양과 관련된 상징이고 하늘로의 초월의 관념을 담고 있는 풍요로운 그림이라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새해 첫날 횃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세 마리의 까마귀를 올려놓던 우리네 습속이 솟대를 만들어낸 것이고 까마귀는 후세에 까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그간의 사정이, 회전하는 태양의 상징인 숫자 '3'과 태양의 흑점이자 하늘의 운행을 땅에 전해주기 위해 날아오는 '새'가 만난 상징의 접점이라면 말이다. 더군다나 그 접점이 하나의 주술이자 신성으로서 누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면 말이다. 그러한 예술이 그것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채 이 뉴밀레니엄 시대에 찬밥신세로 강등되고 있다면 문제는 정말 간단치가 않은 것이다.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조목조목 따져 묻고 상상한 책이다. 서두에 꺼낸 '솟대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세 마리의 새'는 책 표지에 상징적으로 나와 앉은 이미지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네 이미지다. 단순한 듯하지만(채 2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이지만)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이미지다(책이다).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예술이 자행한 면모는 어떠한가. '영혼에 감응을 주지 못하는 예술, 오로지 텅 빈 기표만으로 이루어져 부유하는 이미지들의 혼돈, 그것이 이 시대 고도 소비사회에서 이미지와 예술이 처한 현실'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넘쳐나는 욕망의 장식물로 퇴화한 예술과 문명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상야릇한 이미지로 채워진 타로 카드, 고분 벽화라든가 고대 문명의 유물들, 또 사원 안에 자리 잡은 성화들,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에 속했던 화가들의 그림들. 그 이미지들이 역동적으로 뿜어내는 힘이 바로 현대 모더니즘 예술이 배제한 예술 외적인 것, 즉 보이지 않는 세계, 이 세상 너머의 초월적인 세계와 관계되어 있음을 밝힌다.


저자는 '예술작품이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호 체계임은 틀림없지만 그 의미가 명료하거나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예술의 상징적인 전달 방식은 의미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의미를 숨기는 구조라는 점에 주목한다. 논리나 개념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카두세우스와 같은 이미지를 예로 들며, 신화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상징들의 힘, 그 분위기의 현현을 지적한다. 그것은 벤야민의 '아우라'에 대응되는 것으로 '영성의 흔적'이자 '신비의 그림자'와 같다. 그 아우라에 주목하는 일, 그것은 분명함과 명료함을 선호하는 우리 시대에 새로운 예술의 독법을 선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아우라', 즉 상징적 이미지가 지닌 영적인 분위기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에 저자는 안타까움을 표한다. 또한 상징의 아우라는 기계론적 사유로는 포착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직관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으로, 우리 삶의 체험 속에 비합리적인 영역을 배제하지 않고, 비합리적인 에너지를 집중시켜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영적인 힘과 관계가 있다.


저자가 2장에서 주목하는 뱀과 새, 가면, 성상, 만다라 등은 신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인간이 오랫동안 세계와 접하면서 쌓아온 경험의 축적체다. '자연의 신비, 자연이 지닌 압도적 힘과 숭고함을 접하면서 인간 마음의 흔적들 그리고 인간 운명의 불가해함과 저항 불가능성 등에 대한 체험'을 담아낸 원형적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들은 경험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상징적, 주술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이미지의 힘을 공식화하는 비학(秘學) 등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공통된 뿌리에서 비롯되었으므로 하나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이 이미지를 통해 세계 전체에 두루 퍼져 있는 영성과 교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이때, 예술이 바로 그 교감의 신비를 드러내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저자는 귀스타브 모로나 오블리 비어즐리, 보들레르와 같은 신비주의자들과 독일의 행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나 영국의 대지 예술가 리처드 롱의 경우를 소상히 열거한다. 이들의 사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 존재하는 것에 대해 명상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일체감을 느끼는 일, 작은 우주인 인간이 커다란 우주와 조응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입장에 튼실한 준거틀이 된다. 인간 내면의 영적인 황금을 찾는 연금술, 형상을 통한 우주와의 조응을 시도하는 기하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자에 따르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현대 예술의 다양한 움직임들은 '감동'과는 무관한 하나의 추상이자 기호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의미를 잃어버린 채 물신으로 바뀌어버린 현대 예술의 현주소인 것이다. 오락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예술의 현주소에는 과거, 신화의 시대에 떠맡았던 우주의 신성함 매개체 역할 포기가 가장 큰 원인이다. 인간을 중심에 놓았던 가치관들이 결국 인간을 반쪽짜리 불구로 만들어놓은 형국이다.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가 앓고 있는 여러 병적 징후들은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기운에 공명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예술의 몫은 바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를 매개함으로써 소우주 인간이 대우주와 감응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데에 있다. 예술이 그러한 제몫을 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우선 잃어버린 영적 감수성을 먼저 회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영적 인식 능력을 회복시키는 문제이자, 인간 스스로가 풍요로워지는 문제다.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솟대 위의 새들이 응시하는 '그곳'을 지향하는 책이자 '그곳'이 있음을 증거하는 상징물이다. 그 상징물을 바라보며 안 보이는 곳까지 상상하는 일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 독자의 한 틈에 끼여 내가 외운 주문은 무엇이었던가. 거부감도 있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신'이라니, '신성' 혹은 '영성'이라니! 앞만 보고 달려가기도 바쁜데 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니!


그러나 이 책은 현대 예술과 현대의 여러 불모적 상태를 생산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음을, 그것의 명백한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타진한다. 잃어버린 나의 반쪽이자 나의 그림자를 찾아 나서는 예술을 생각하면 마음은 벌써 온 우주와 조응하며 합치를 이룬 듯 풍요로워진다. 나의 반쪽, 나의 그림자라는 개념 속에 이미 인간중심적 사고가 뿌리깊이 박혀 있다고 해도 말이다.


단순한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아우라, 그것이 갖는 신비로운 힘, 그 힘이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마법의 세계로 이끈다면, 기꺼이 이미지를 보리라. 뚫어지게 응시하리라. 그리고 그 이미지가 뿜어내는 기운에 과감히 몸을 던지리라. 하지만 아직 조급증과 조갈증에 몸이 탄다. 영혼의 한쪽도 타고 있리라.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일조차 천형으로 느껴지는 것, 몸과 영혼이 느끼는 이 갑갑증은 어디서 파생된 것일까. 교육에 의한 것일까? 인간의 숨통을 거미줄처럼 조이는 이 사회의 무수한 제도에 의한 것일까? 아님 선천적인 것일까?


'신성'과 '영성'을 찾기 위해 이미지 뒤편을 바라보는 일과 이편에 서서 이곳을 견디는 일 사이의 길항, 그 끈을 놓쳤을 때의 분열을 염려하는 것은 이 책을 제대로 못 읽어낸 탓일지도 모르겠다. '리비도의 일시적 퇴행 단계'에서 설명하듯 위협적인 악이나 공포로 경험되는 '어둠의 재생 준비 기간'인지도…….


그러나 이 책의 <연금술, 영적인 황금을 찾는 길>에서 소개되는 '백화'의 단계는 시선을 끈다. 물질적인 지상의 세계를 초월한다는 흰색의 단계. 빛의 색이며 정신의 색으로, 영성이 깨어난다는 단계. 황금을 얻는 적화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영혼이 깨어날 수 있다는 그곳이, 나는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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