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일기 #5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 김지혜 지음

by 김담유


서대문 일기 #5



1. 빛

영천시장 입구에 빛이 들었다

아치형으로 굽은 간판이 번쩍거린다

生의 모든 첫 순간처럼!

그러나

시장의 자존심은 저 안쪽의 어둠이다

골목 앞에 나와 앉은 노파

골목 앞에 나와 숨바꼭질하는 아이들

골목 앞 좌판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욕망처럼

쌓여 있는 귤과 사과와 홍시 무더기

노출되면 쏜살같이 달아나던 비굴한

시궁쥐 몇이

저 빛의

안쪽이다


2. 나무

시장 안쪽 은선포목에는 숨어 사는 일가가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체했다. 시장의 대표이사가 알아차리는 날 일가는 모두 내쫓김을 당할 터였다. 일가의 가장은 한때 사제가 되려 했다. 여자가 약을 먹고 인연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가를 이룰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일가는 다락에 모여 잤다. 여자는 점포에 남아 밤을 지새웠다. 바느질을 막 배워 꾸린 점포는 그녀의 자궁이었다. 최초의 공간, 공간의 최초였다. 최초를 지키는 파수꾼인 그녀는 점포 안쪽, 다락에 올려 보낸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치마저고리를 지었다. 아이들은 곧잘 쌀을 씻어왔다. 작은 것은 20원, 큰 것은 50원 받는 공동변소 여주인도 아이들에게 호스를 흔쾌히 대주었다. 물은 공짜였다. 물에선 석유빛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배앓이를 했다. 대변 봉투를 만들어가야 하는 날엔 큰아이 혼자 신문지를 들고 변소로 갔다. 대변 봉투 세 개가 만들어졌다. 한 아이가 회충에 걸리면 세 아이 모두 약을 타 먹었다. 그러나 가장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혔다. 큰아이는 삼국지를 곧잘 읽었고 둘째 아이는 소공녀에 심취했으며 막내는 파브르의 곤충기를 넘겼다. 해 질 무렵이면 아이들은 재잘재잘 기도문을 외웠다. 아이들이 다락에 모여앉아 로사리오 기도를 외고 있으면 가장이 돌아왔다. 가장은 피복 공장에 다녔다. 고향 친구가 어렵사리 마련해준 자리였으나 가장은 여관 장사를 하고 싶었다. 목돈을 만들고 싶었다. 일가를 일시에 구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원은 차츰차츰 젖어드는 가랑비처럼 가장의 어깨를 짓눌렀다. 가장의 절망은 세 평짜리였다. 두 발로 딛고 설 땅은 다락밖에 없었다. 그마저 허리를 굽혀야 했다. 허리가 굽어가던 가장은 어느 날 훌쩍 사라졌다. 길 가는 무리를 따라갔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여자의 입은 해 저문 지평선처럼 어두워져갔다. 아이들은 가장이 사라진 다락을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다락은 벌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벌판에 부는 바람이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른다는 사실을, 한 번 찔린 폐부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여자의 입만 바라보았다. 여자는 사라진 남자의 종적에 대해 함구했다. 여자는 초저녁인데도 점포 현관을 닫아걸고 불을 껐다. 건너편 의상실의 불빛이 캄캄한 점포 안 바닥에 유리 조각으로 깔렸다. 산산조각 난 사금파리처럼 여자는 지상의 가장 낮은 땅으로 주저앉았다. 그날 여자는 아이들의 책을 팔았다. 책이 치워진 자리, 벌판은 더 넓어졌으나 아이들은 좀처럼 달려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잠든 아이들 옆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죽였다.

3. 새

마음껏 뜻을 펼쳐 날아가는 날것을 새라 일러준 것은 가장이었다. 그 새를 붙잡아 말뚝에 묶어두고 품으라 이른 것은 여자였다. 그날 밤 여자는 아이들 옆에서 소리 죽여 흐느꼈다. 여자의 울음은 그렇게 천 년을 흘렀다. 아이들의 꿈자리는 축축했다. 축축한 물기를 머금고 세 그루의 나무가 자랐다. 한 그루의 나무에선 水가, 한 그루의 나무에선 火가, 한 그루의 나무에서 土가 맺혔다. 한 아이는 바다로 나아가 물결을 일으켰고 한 아이는 횃불이 되어 사위를 밝혔으며 한 아이는 언덕이 되어 바람을 막았다. 천 년이 흘렀다. 물결 치솟는 바다에서 새 떼가 날아올랐다. 이윽고 새 떼는 바다 건너 태양을 향해 날았다. 태양을 통과한 새 떼만이 언덕 위 나무에 다다랐다. 억겁의 신열을 앓는 새 떼도 있었다. 새 떼는 가지에 내려앉아 남루해진 깃털을 다듬었다. 새 떼의 부리는 빛을 물고 있었다. 순간순간 반짝였다. 일부는 다시 날아올랐다. 일부는 흙을 물고 둥지를 틀었다. 풍성한 나무 잎사귀가 둥지를 가렸다. 둥지 안쪽에는 다른 무늬를 가진 알들이 소복했다. 알을 품고 앉은 새 떼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 떼를 먼발치에서 보았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곳, 한 점 바람처럼 흐르고 있는 것은 날개였다. 먼 데를 바라보며 알을 품고 있는 새의 눈도 날개였다. 날개의 행로마다 저녁놀이 늘었다. 떠나가는 날개와 남아 있는 날개가 저녁의 심장 부근에서 포개지며 번졌다. 나무와 언덕과 새와 태양과 바다가 움찔하며 교합하는 순간, 떠나가는 날개가 태양을 덥석 물었다. 마침내 태양이 사라진 자리, 어두워지는 사위 속에서 남아 있는 날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